by 세르게이 예세닌
헤이, 내 고향 러시아여,
세르게이 예세닌
헤이, 내 고향 러시아여,
초가집들은 성상처럼 승복(僧服)을 입었네…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그곳,
푸르름만 눈에 물드네.
이방의 순례자인 듯
나는 네 들판을 바라보네.
낮은 울타리에
백양나무는 소슬하게 하늘거리네.
사과 향기, 꿀의 향기가 퍼지고
교회마다 너의 온화한 구세주.
원무 너머로는 초원이 이루는
즐거운 춤.
초록의 너른 들판,
다져진 오솔길을 따라 나는 달리리.
강아지풀처럼 나를 맞는
여자애들의 웃음소리.
만일 신군(神軍)이 외치길
“러시아를 버리고 천국에 살라” 하면
나는 답하리, “천국은 필요 없으니
내 고향을 달라”고.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Esenin)은 1895년 10월 3일 랴잔(Рязань, Ryazan) 지방의 콘스탄티노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9년, 세르게이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스파스 클레프키 마을에 있는 교사 세미나에 갔는데 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지도교사의 조언에 따라 시작(詩作)에 몰두하기 위해 그는 1913년 3월 모스크바로 떠난다.
1915년 3월 9일, 상징주의 시(詩)로 저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진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블로크는 예세닌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등 도움을 주었으며 그를 “천부적인 재능의 농민시인”으로 불렀다. 예세닌은 자신이 블로크와 클류예프로부터 서정시풍을 배웠고, 벨리로부터는 형식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1916년 2월, 첫 시집인 ≪초혼제≫가 출간되자, 예세닌의 명성은 순식간에 높아져 황후와 공주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황금 시계와 목걸이를 받았다. 그러나 예세닌은 혁명에 동감해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예세닌은 1919년을 자기 생애의 최고의 해로 간주했다. 그에게 서점과 출판사, 보헤미안 문학 카페인 ‘페가수스의 마구간’에 대한 감독권이 주어졌다. 이 시기 그는 여러 시인들과 함께 ‘이미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미지주의 문학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1918년 혹은 1919년에 예세닌은 공산당에 가입하고자 지원했다. 그러니 그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어떤 혹은 모든 규율에 이질적’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열정적인 사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점차 소외와 고독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1921년에 그는 “흔히, 서정시인은 오래 살지 못한다”라고 적는다.
1921년 11월, 예세닌은 미국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을 만났다. 그녀는 그보다 열여덟 살 연상이었다. 그들은 1922년 5월 2일 결혼했고, 5월 10일 유럽과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미국 생활은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는 뉴욕을 혐오했으며 자살을 생각할 만큼 권태로웠다. 그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영감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예세닌은 덩컨과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음주와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23년 8월 5일경 그들은 모스크바로 되돌아왔고 10월 말 경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다.
예세닌은 권태와 우울증에 빠졌으며, 알코올 중독과 환각으로 고통을 받았다. 정신적 안식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그는 두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무력감을 느꼈다.
1925년, 예세닌은 장시 <페르시아 모티프>와 <안나 스네기나>를 썼던 바쿠로 갔다. 환각이 그랬던 것처럼 피해망상증도 그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1월 그는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12월 21일 그는 갑자기 병원을 떠나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페테르부르크로 떠나 호텔에 투숙해 12월 28일, 성상(聖像)이 놓인 구석의 수도관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세르게이 예세닌과 이사도라 던컨
불꽃처럼 타오른 예술과 사랑:
세르게이 예세닌과 이사도라 던컨
20세기 초, 예술의 지형을 뒤흔들었던 두 개의 거대한 별이 만났다. 한 사람은 러시아의 대지를 노래한 서정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맨발의 무용가로 불리며 현대 무용의 지평을 연 이사도라 던컨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두 예술가의 결합을 넘어,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그리고 세대를 뛰어넘은 뜨거운 예술적 충돌이자 비극적인 서사시였다.
운명적 만남과 언어를 초월한 교감
이들의 이야기는 1921년,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되었다. 무용 학교 설립을 위해 소련을 방문한 이사도라 던컨은 한 연회장에서 세르게이 예세닌을 만난다. 당시 던컨은 40대 중반의 성숙한 예술가였고, 예세닌은 2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다.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이들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두 사람 사이에 공통된 언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예세닌은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던컨은 러시아어를 거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눈빛과 몸짓, 그리고 예술가로서 공유하는 영혼의 울림만으로 서로를 깊이 이해했다. 던컨은 예세닌의 금발 머리와 푸른 눈에서 러시아의 순수함을 보았고, 예세닌은 던컨의 자유로운 춤사위에서 구속받지 않는 생명력을 발견했다. 이들은 만난 지 불과 몇 달 만에 결혼에 골인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예술적 영감과 파괴적인 갈등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영감의 원천인 동시에 고통의 연속이었다. 예세닌은 던컨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서구 세계를 경험했다. 그러나 화려한 조명 뒤에서 예세닌은 점차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신처럼 추앙받던 시인이었지만, 서구 사회에서 그는 단지 '이사도라 던컨의 젊은 남편'으로만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외감은 예세닌을 심한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으로 몰아넣었다. 광기 어린 질투와 방황, 그리고 이어진 폭력적인 갈등은 두 사람의 관계를 빠르게 좀먹어 갔다. 던컨은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그를 보듬으려 애썼지만, 예술적 자아가 너무나 강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는 공존할 수 없는 불꽃과 같았다. 결국 이들은 결혼 2년여 만에 별거를 선택하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은 두 사람
이들의 별거는 그들이 겪은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예세닌은 러시아로 돌아온 뒤 정신적인 방황을 거듭하다 1925년,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피로 마지막 시를 남기며 고통스러웠던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예세닌의 비보를 듣고 슬퍼하던 이사도라 던컨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허망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27년 프랑스 니스에서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그녀의 긴 스카프가 달리는 차바퀴에 말려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인생에서 죽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살아가는 것 또한 결코 더 새로운 일은 아니라네."
세르게이 예세닌이 1925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앙글레테르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자신의 피로 쓴 마지막 시는 <안녕히, 나의 친구여, 안녕히(Goodbye, my friend, goodbye)>이다. 이 시의 위 마지막 구절은 그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을 앞둔 심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안녕히, 나의 친구여, 안녕히.
사랑하는 그대, 그대는 내 마음속에 있다네.
예정된 이 이별은
미래의 만남을 약속하는 것이라네.
안녕히, 나의 친구여, 말도 손짓도 없이,
슬퍼하거나 눈썹을 찌푸리지 말게.
이 인생에서 죽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살아가는 것 또한 결코 더 새로운 일은 아니라네.
혈서로 쓰인 시: 당시 호텔에 잉크가 없었기 때문에 예세닌은 자신의 손목을 그어 흘린 피로 이 시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 시는 죽기 전날 친구인 시인 빅토르 에를리히(Viktor Erlich)에게 건네졌으며, 예세닌은 "나중에 읽어보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사도라 던컨에게 보낸 작별인사: 이 시에서 언급된 '친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던컨에게 보내는 사랑과 함께 이해를 구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로 해석한다.
이 시는 삶의 허무함과 고통을 끝내려는 시인의 쓸쓸한 마음이 담겨 있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구절로 남아 있다.
세르게이 예세닌과 이사도라 던컨의 사진 속 모습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대의 아픔과 예술적 고뇌, 그리고 감당하기 힘들었던 뜨거운 사랑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끝은 비극적이었을지라도, 두 사람이 짧은 시간 공유했던 불꽃같은 열정은 오늘날까지도 시와 무용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진정한 예술적 영혼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영혼이 또 다른 영혼을 만났을 때 얼마나 거대한 섬광을 내뿜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