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생각하기를

by 안나 아흐마토바

by 김양훈

그리고 생각하기를

안나 아흐마토바

그리고 생각하기를

이곳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울리지 않을 것이니.

다만 구석기의 바람이

검은 문을 두드릴 뿐.


그리고 생각하기를

나는 홀로 이 하늘 아래 살아남았으니,

처음으로 내가 원했던 것은

죽음의 잔을 마시는 일.


[詩評]

폐허의 하늘 아래 선 단독자의 의지
— 안나 아흐마토바의 「그리고 생각하기를」

러시아 시문학의 ‘은세기(Silver Age)’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시대의 비극을 몸소 관통하며 그 고통을 정제된 시어로 치환해 낸 시인이다. 그녀의 짧은 시 「그리고 생각하기를」은 개인적 고립을 넘어, 문명의 종말론적 풍경과 그 속에 던져진 한 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서늘하게 그려낸다. 이 시는 아흐마토바가 겪었던 가혹한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절망 끝에서 피어난 비극적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1. 역사적 진공 상태와 ‘목소리’의 소멸

시의 전반부는 철저한 부재(不在)의 공간을 설정한다. “이곳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울리지 않을 것이니”라는 첫대목은 물리적 적막이 아니다. 스탈린 체제 아래서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숙청되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당시 소련의 공포 정치를 상기할 때, 이 ‘목소리의 부재’는 소통과 인간성이 박멸된 시대적 진공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표현은 “구석기의 바람”이다. 시인은 현재의 고통을 당대의 사건으로 국한하지 않고 인류 문명 이전의 태초적 시간으로 확장한다. ‘구석기’라는 시어는 문명이 거세된 황량한 원시성을 상징하며, 인간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비인칭적인 자연의 폭력뿐임을 암시한다. “검은 문을 두드리는” 바람의 형상은 죽음의 사자(使者)처럼 위협적이며, 이는 개인이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힘을 시각화한다.

2. 살아남은 자의 형벌과 ‘죽음의 잔’

마지막 2연에 접어들어 시선은 외부의 풍경에서 시인의 내면으로 급격히 수렴된다. “나는 홀로 이 하늘 아래 살아남았으니”라는 구절에는 생존의 기쁨이 아닌, 형벌과도 같은 고독이 서려 있다. 아흐마토바는 첫 남편 니콜라이 구밀료프의 처형과 아들의 투옥, 그리고 동료들의 망명과 죽음을 지켜보며 홀로 남겨진 자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처음으로 내가 원했던 것은 / 죽음의 잔을 마시는 일”이라는 고백은 치명적인 비장미를 띤다. 여기서 ‘죽음의 잔’은 두 가지 층위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견딜 수 없는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멸의 욕구이며, 둘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적 운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주체적 수용의 태도다. 소크라테스의 독배처럼, 시인은 죽음을 갈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죽음조차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자유, 즉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절제와 응축: 슬픔을 다스리는 시적 문법

이 시의 탁월함은 감정의 과잉을 엄격히 통제하는 절제미에 있다. 아흐마토바는 자신의 슬픔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구석기의 바람’, ‘검은 문’, ‘죽음의 잔’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내면의 황무지를 독자의 눈앞에 펼쳐 놓는다.

문장 구조 또한 지극히 간결하다. “그리고 생각하기를(And I thought)”로 반복되는 서두는 시인의 사유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고독 속에서 정제되고 확정된 결론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낮은 목소리는 오히려 독자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며, 시적 화자가 처한 고립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4. 폐허에서 건져 올린 존엄

「그리고 생각하기를」은 ‘상실 이후의 삶’에 대한 시적 기록이다. 모든 목소리가 사라진 폐허 위에서 시인은 비로소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아흐마토바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죽음을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그 죽음에 침식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저항이었다.

그녀는 망명이라는 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고통스러운 조국의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시대의 증언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실존적 결단의 전초전과도 같다. 죽음의 잔을 기꺼이 마시겠다는 시인의 선언은, 비극적인 시대를 통과하는 예술가가 지닐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태도이자 인간 존엄의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이 짧은 시 한 편은 구석기의 바람이 몰아치는 시대의 문턱에서 우리가 어떻게 고독을 응시하고,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껴안아야 하는지를 서늘한 문장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안드레이 플라토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