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루훼로'는 누구인가?

그는 배재학당 교사였던 러시아 망명객 콘스탄틴 벨리페로였다

by 김양훈
동인지 《백조(白潮)》는 우리나라에 낭만주의를 소개, 정착시켜 한국 근대 낭만주의의 화원(花園)으로도 불리며 편집인에 홍사용(洪思容), 1호 발행인은 H.G.아펜젤러, 2호 발행인은 보이스 부인, 3호 발행인은 훼루훼로, 발행사는 경성문화사이며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등 휘문의숙 출신 문학청년들과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출신의 나빈(羅彬), 박영희(朴英熙 등의 교유에 의해서 탄생하였다.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도향(稻香) 나빈(羅彬),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 우전(雨田) 원세하(元 ), 춘성(春城) 노자영(盧子泳), 오천석(吳 天錫) 등이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박영희의 추천으로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과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이 함께 후기 동인으로 가입(3호부터 참가)하게 되는데 특히,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이 주축이 되었다. 《백조》는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여러 장르를 다룬 종합 문예 동인지였으나 동인들 대부분이 시인들이었고 3·1운동 이후 나아갈 지평이 드러나지 않아 장르 선택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으며, 동인들의 문학적 소양의 미성숙으로 백조의 작품 대다수가 시로 편향되는 현상을 낳았다.
동인지 《백조》 3호의 발행인으로 기록된 '훼루훼로'는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매우 흥미롭고도 신비로운 인물이다. 그의 정체는 러시아 혁명 이후 고국을 떠나 조선으로 흘러 들어온 러시아 망명객 콘스탄틴 벨리페로(Constantin Beliferov)다.
배재학당 당시 외국어 수업

1. '훼루훼로'의 정체: 콘스탄틴 벨리페로(Constantin Beliferov)

•배경: 그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1917) 이후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도망친, 이른바 '백계 러시아인(White Russians)' 중 한 명이었다.

•조선 정착: 당시 많은 러시아 망명객이 만주나 상해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벨리페로는 서울(경성)에 정착하여 배재학당(배재고보)에서 음악과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했다.

•이름 표기: 당시 문헌에는 '훼루훼로', '벨리페로', '페루페로'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2. 《백조》 발행인이 된 배경

《백조》는 홍사용을 비롯한 휘문 출신과 나도향, 박영희 등 배재 출신 문학청년들이 결합하여 만든 잡지였다.

•검열과 행정적 이유: 당시 일제의 출판 검열은 매우 까다로웠다. 잡지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발행인 명의가 필요했는데, 1호(아펜젤러)와 2호(보이스 부인)에 이어 3호에서는 배재학당 교사로 재직 중이던 외국인 벨리페로(훼루훼로)의 명의를 빌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구 외교관이나 선교사 계열의 외국인을 내세움으로써 일제의 간섭을 피하려 했던 당시 문단 전략의 일환이었다.

3. 문학적 연결고리: 러시아적 우울의 전파

벨리페로는 단순한 명의 대여자를 넘어, 《백조》 동인들에게 러시아 문학의 정서를 직접 전달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정서적 교감: 박영희와 박종화 등 《백조》 동인들은 당시 '슬라브적 우울'과 '세기말적 허무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벨리페로는 그들에게 러시아 본토의 시와 문학적 분위기를 전해주는 실질적인 통로 역할을 했다.

•음악적 영향: 그는 음악가이기도 했기에, 언어의 음악성을 강조하던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리듬과 선율에 대한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4. 역사적 의의

벨리페로(훼루훼로)라는 이름은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러시아 문학이 일본을 거친 중역(重譯)뿐만 아니라, 망명 지식인과의 직접적인 조우를 통해서도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증거다.

그는 1920년대 초반 서울의 카페나 학교 교정에서 조선의 청년 문사들과 어울리며, 러시아 은세기 문학의 그늘진 우울과 낭만주의적 열정을 나누었던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러시아 망명객 훼루훼로를 위한

가상의 <문학 에세이>

배재학당 모습

1. 프롤로그: 경성의 안개와 이방인의 그림자

1920년대 초반의 경성은 거대한 상실의 공간이었다. 1919년 3·1 운동의 격정적인 함성이 지나간 자리에는 일제의 더욱 교묘해진 문화정치와 그 이면에 도사린 서늘한 패배감이 안개처럼 자욱했다. 봉건적 구습은 이미 무너졌으나 근대의 빛은 아직 희미했던 그 혼돈의 시대, 조선의 청년 문사들은 갈 곳 없는 열정을 ‘낭만주의’라는 이름의 도피처 혹은 해방구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 무렵, 서구 문명의 발상지라 믿었던 유럽에서조차 전쟁의 참화와 혁명의 광풍을 피해 동쪽으로 흘러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바로 ‘백계 러시아인(White Russians)’들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붉은 물결을 피해 만주와 상해를 거쳐 반도로 들어온 이들 중에는 콘스탄틴 벨리페로(Constantin Beliferov)라는 인물이 있었다. 우리 문학사에서 ‘훼루훼로’ 혹은 ‘페루페로’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기록된 그는, 단순한 망명객을 넘어 한국 근대 문학의 가장 탐미적이고 우울한 시기였던 《백조(白潮)》 시대의 정체성을 형성한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註] 백계 러시아인 사회는 20세기 초 국제정치 상황에 휘둘린 망명촌이었다. 1920년대 초 한반도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볼셰비키에 쫓겨 피난 온 백계 러시아인들의 피난처였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상하이, 홍콩, 하얼빈,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다시 떠났지만, 일부는 한반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반도에 머문 사람들은 식민지시기 조선의 경성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 백계 러시아인 사회를 만들었다. 경성에는 정동과 남대문 일대를 중심으로 백계 러시아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정동에는 주로 제정러시아 귀족과 장교, 성직자들이 살았고 상대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남대문 일대에 살았던 백계 러시아인들은 오늘날 3D 업종에 해당하는 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는 폴란드 귀족의 자손인 유리 얀코프스키가 동아시아의 백계 러시아인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노비나’ 촌을 만들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일본식민당국의 후원으로 농장 경영, 가축 사육, 사냥, 휴양지 제공 등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조선의 백계 러시아인 사회는 20세기 국제정치에 또다시 좌우되었다. 1940년에 들어서 국제정세에 전운이 감돌자, 백계 러시아인들은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떠나지 못하고 1950년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던 백계 러시아인들은 북한군 포로로 송환되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황동하 교수의 논문 <식민지 조선의 백계 러시아인 사회> 초록 발췌 (논문 전문은 아래 파일 참고)
배재학당 교실 모습

2. 배재학당의 교단에서 피어난 ‘슬라브적 비애’

벨리페로가 정착한 곳은 서구 근대 교육의 산실이었던 배재학당(배재고보)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로 재직하며, 나도향(나빈), 박영희(회월)와 같은 당대 최고의 문학 청년들과 조우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개 일본을 통해 굴절된 서구 문학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벨리페로라는 인물의 등장은 러시아 문학의 정수,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를 휩쓸었던 ‘은세기(Silver Age) 상징주의’ 문학이 직접적으로 조선의 토양에 이식되는 통로가 되었다. 벨리페로는 단순히 단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고국을 잃고 떠도는 망명객의 처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징’이었으며, 그가 읊어주는 러시아 시의 리듬과 그가 연주하는 단조의 선율은 조선 문인들에게 ‘조선 너머의 거대한 슬픔’을 상상하게 하는 매개체였다.

러시아어에는 ‘토스카(Toska)’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단순한 슬픔(Sadness)이나 그리움(Longing)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대지의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함에서 오는 영혼의 갈증을 의미한다. 벨리페로는 배재학당의 교정에서, 그리고 경성의 다방에서 이 ‘토스카’의 정서를 전파했다. 나라를 잃은 조선의 시인들에게 나라 없는 러시아인이 전하는 이 비애의 미학은 식민지 지식인의 무력감을 정당화하고 미화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예술적 도구였다.

3. 《백조》의 탄생과 훼루훼로라는 이름의 방패

1922년 1월 9일, 한국 근대 낭만주의의 화원이라 불리는 종합 문예 동인지 《백조》가 창간되었다. 홍사용(노작), 박종화(월탄), 박영희(회월) 등이 주축이 된 이 잡지는 퇴폐적이고 유미적인 낭만주의를 표방했다. 흥미로운 점은 《백조》 3호의 발행인으로 기록된 인물이 바로 ‘훼루훼로’, 즉 벨리페로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제의 출판 검열은 극도로 까다로웠다. 조선인이 발행하는 잡지는 사사건건 간섭을 받았으나, 서구 외교관이나 선교사 계열의 외국인을 발행인으로 내세울 경우 일제는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상대적으로 간섭을 덜 하는 경향이 있었다. 1호의 아펜젤러, 2호의 보이스 부인에 이어 벨리페로가 3호의 발행인을 맡은 것은 이러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다.

하지만 벨리페로는 단순한 명의 대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백조》 동인들이 탐닉하던 ‘세기말적 허무주의’의 실체였다. 박영희와 박종화 등은 당시 러시아 상징주의가 지닌 음울한 환상성에 매료되어 있었다. 벨리페로는 그들에게 블로크(Alexander Blok)나 베를렌(Paul Verlaine) 등의 시적 분위기를 전달하며, 언어의 구축보다는 영혼의 울림과 선율을 강조했다. 시를 ‘언어의 예술’ 이전에 ‘음악의 연장’으로 보았던 러시아 상징주의의 원칙은 벨리페로라는 음악 교사를 통해 《백조》 시인들의 작품 속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배재학당의 학생들

4. 박영희와 나도향: 벨리페로의 그림자

벨리페로의 영향력은 배재 출신인 박영희와 나도향의 초기 작품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박영희의 대표작 〈월광으로 짠 병실〉에서 묘사되는 병적인 정서와 폐쇄적인 공간은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데카당스’의 풍경과 일치한다. 그는 벨리페로가 체현했던 망명객의 고독을 식민지 지식인의 무력감과 결합하여, 현실을 ‘무덤’이나 ‘병실’로 인식하는 극단적인 미학을 구축했다. 벨리페로가 가르친 음악적 감수성은 박영희로 하여금 시의 의미보다는 그 울림과 리듬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는 한국 근대 시사에서 ‘상징주의’가 자리를 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도향 역시 초기 시절에는 극도의 감상주의와 비극적 세계관에 침잠해 있었다. 그의 초기 수필과 단편 소설들에 흐르는 연민과 비애는 도스토옙스키적 ‘수난’의 정서와 닿아 있다. 벨리페로와 같은 망명객들이 처한 절박한 처지는 나도향에게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비극적 운명을 응시하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비록 나도향은 훗날 사실주의적인 경향으로 선회하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은 1920년대 초 벨리페로와 나누었던 정서적 교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5. 디아스포라적 연대: 국가를 잃은 자들의 공명

벨리페로와 《백조》 동인들의 만남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닌 ‘영혼의 공명’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고향을 잃은 러시아인과 일제 강점기에 주권을 잃은 조선인은 ‘국가’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오직 ‘인간의 영혼’ 그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고통을 단순히 슬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아름다운 여인’, ‘달빛’, ‘장미’와 같은 미학적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벨리페로가 전해준 러시아의 ‘토스카’는 조선의 ‘한(恨)’과 만나 식민지 조선만의 독특한 낭만주의를 탄생시켰다. 이는 현실 정치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고통을 예술이라는 고결한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또한 벨리페로 외에도 당시 경성을 거쳐 간 포포프(Popoff)와 같은 러시아 음악가들과 극단원들은 조선 청년들에게 러시아 특유의 단조 감성과 내면 심리 묘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이 모든 흐름은 훗날 한국 문학이 단순한 계몽과 기록의 차원을 넘어 인간 심연의 고통과 존재의 허무를 탐구하는 현대적 문학으로 나아가는 자양분이 되었다.

6. 에필로그: 100년의 시간을 넘어 흐르는 잔향

벨리페로, 즉 훼루훼로라는 이름은 문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그가 1920년대 경성의 안개 속에서 읊어주었던 러시아 시의 잔향은 한국 현대시의 유전자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우리가 고독한 시절에 시를 읽으며 위안을 얻고, 삶의 허무를 노래하면서도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애쓰는 것은, 100년 전 배재학당의 교정에서 이방인 교사와 조선의 청년들이 나누었던 교감의 연장선상에 있는지도 모른다. 벨리페로는 우리에게 ‘고독을 견디는 품격’을 가르쳐주었고, 한국 근대 문학은 그 품격을 바탕으로 낭만주의라는 찬란한 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에서 온 ‘토스카’는 그렇게 조선의 병실과 무덤을 거쳐 우리 문학의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서정적 원천이 되었다. 훼루훼로, 그 신비로운 이름은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과 가장 직접적이고 정서적으로 맞닿았던 한 시절의 상징으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배재학당의 초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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