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세르게이 예세닌
자작나무
세르게이 예세닌
내 창문 밑
하얀 자작나무
마치 은(銀)으로 덮이듯
눈으로 덮여 있다.
부풋한 어린 가지 위에는
눈의 가장자리 꾸밈
꽃이삭이 피었구나
흰 술처럼.
자작나무는 서 있다
조으는 고요함 속에,
금빛 불꽃 속에서
눈이 반짝이고 있다.
노을은 게으르게
둘레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은(銀)을
어린 나뭇가지에 뿌렸다. (1913)
은백색 고요 속에 피어난 영원한 노스탤지어
막심 고리키가 "타고난 시인"이라 극찬했던 세르게이 예세닌은 평생 러시아의 자연과 시골 마을의 서정을 노래한 인물이다. 1913년, 그의 나이 불과 열여덟 살에 발표된 시 「자작나무」는 예세닌 문학의 원형이자, 러시아 문학이 사랑하는 '자작나무'라는 상징을 가장 순수하고 투명하게 형상화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1. 시각적 이미지의 극치: 은(銀)과 빛의 변주곡
이 시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철저하게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독자를 환상의 공간으로 초대한다는 점이다. 예세닌은 자작나무를 하나의 식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눈 덮인 나무를 '은(銀)'이라는 금속적 광택의 이미지와 결합해, 일상적인 풍경을 성스럽고 고귀한 예술적 오브제로 둔갑시킨다.
"마치 은으로 덮이듯 / 눈으로 덮여 있다."
여기서 '은'은 단순히 색깔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자작나무가 지닌 순결함과 차가운 아름다움을 동시에 투영하고 있다. 특히 2연에서 묘사된 '눈의 가장자리 꾸밈'과 '흰 술' 같은 비유는 겨울나무의 미세한 질감을 손에 잡힐 듯 형상화한다. 마치 정교한 세공사가 빚어놓은 듯한 자작나무의 모습은 자연에 대한 시인의 깊은 관찰력과 애정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2. 고요와 역동의 조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
3연과 4연에 이르면 시의 공간은 정적인 '상태'에서 동적인 '흐름'으로 바뀐다. 자작나무가 '조으는 고요함' 속에 서 있다는 표현은 겨울날의 적막한 대기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정적은 박제된 것이 아니다.
·금빛 불꽃: 눈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금빛 불꽃'이라 표현하며 시각적 화려함을 더한다.
·게으른 노을: 노을을 의인화하여 나무 주변을 '게으르게 돌아다닌다'라고 표현함으로써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처럼 예세닌은 '은색(눈)'과 '금색(노을/햇살)'의 대비를 통해 한 폭의 인상주의 그림과 같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만든다. 노을이 나무 위에 '새로운 은'을 뿌린다는 마지막 행은 자연의 순환과 영원성을 상징하며, 독자로 하여금 신비로운 종교적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3. 러시아적 정체성의 상징: 자작나무
러시아 문학에서 자작나무는 나무 이상의 함의(含意)를 가진다. 그것은 곧 '러시아 그 자체'이자, 시인이 평생 그리워했던 고향의 표상이다. 예세닌에게 있어 창문 밑의 자작나무는 외부 세계와 시인의 내면을 연결하는 매개체라 볼 수 있다.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전야(前夜)였다. 미증유(未曾有)의 격변과 혼란의 시기를 앞두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십 대 소년 예세닌이 포착한 이 투명하고 고요한 자작나무의 풍경은, 파괴되지 않은 러시아의 순수한 정수(精髓)를 지키고자 하는 시적 의지의 발현이었다. 시인은 소박한 주변의 풍경에서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견해 냄으로써, 러시아 민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국민시인의 싹을 보여주었다.
4. 상실된 순수를 향한 찬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세닌의 「자작나무」는 '순수에 대한 시각적 헌사'다. 이 시에는 어떠한 정치적 구호도, 복잡한 철학적 담론도 담겨 있지 않다. 오직 눈과 빛, 그리고 나무가 빚어내는 고요한 조화만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무구함'이 있기에 그의 시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창문 밑의 풍경'을 예세닌은 은빛 시어(詩語)로 그려 놓았다. 1913년의 그 겨울밤, 시인의 눈에 비친 자작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인간 영혼이 깃들 수 있는 고요하고 빛나는 안식처였던 것이다.
러시아의 시인들 중에서 대한민국에 잘 알려진 시인을 뽑으라면 당연히 푸시킨이고 그다음이 바로 예세닌이다. 예세닌의 서정시 <자작나무>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예세닌의 시인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처럼 말이다.
예세닌은 1895년에 태어났다. 푸시킨보다도 100년을 늦게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예세닌의 감성은 푸시킨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모든 러시아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러시아 국민들은 그가 사랑을 할 때 같이 사랑했으며, 그가 조국의 현실을 아파할 때 같이 아파했다.
혁명기의 러시아에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방황을 하는 그는 러시아 국민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짧지만 러시아 국민들의 마음을 울리고 간 시들을 모아 뽑아서 만든 책이 바로 예세닌 서정시선 <자작나무>다.
러시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시집
러시아가 세계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여자'다,라고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러시아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러시아에는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연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다.
자작나무와 서정시인 예세닌
러시아의 아름다움은 자작나무로 상징을 하기도 한다. 러시아 전역에 걸쳐서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자작나무 자체의 아름다움은 특히 겨울에 빛이 나는데 겨울이 긴 러시아에서 당연히 돋보이기 때문이다. 이 자작나무를 포함한 러시아의 자연은 시골 풍경 또는 소도시들과 어울려서 그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리고 서정시인인 예세닌은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그 자연을 이야기한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자연을 그린 그는 농민시인이기도 하다. 농민시인으로서 그는 자연에 살고 있는 따뜻한 마음을 시로 표현한다. 그것은 때로는 어머니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예세닌은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 이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시 속에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시들을 우리는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예세닌에 대하여」
-옮긴이, 박형규의 글
1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은 국민시인이다. 더 러시아적인 작가를 말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시 속에는 러시아의 운명이, 슬픔과 기쁨이 들어 있다. 예세닌은 민중시인이다. 민요에 가까운 그의 시, 어휘뿐만 아니라 모든 내용에 의해 예세닌은 민중시인이다. 예세닌은 복잡한 시인이다. 어쩌면 가장 복잡한 시인 가운데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매력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시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과 인간으로서 마땅한 자비를 표현하기 위하여, 자연에 의해 특별히 창조된 기관(器官)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고리키는 말하고 있다.
예세닌의 서정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의 비밀은 자비로운 인정에 있다. "나는 생각한다. 대지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그 대지 위의 인간들이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전쟁으로 인한 불행한 불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를". 서사시 「안나 스네기나야」 가운데에서 진정한 평화의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암소가 우는 가난한 시골구석, 자작나무, 술집, 러시아의 공업화, 카프카즈와 랴자니, 몰도바인과 그루지야인, 초원과 여자… 이 모든 것이 그의 시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 자신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 자신을 통해 전해졌다.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것 모두가 그의 감정을 동요시켰다. 그는 이야기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했으며, 인간의 마음속에 아직 생겨나지는 않았지만, 생겨날 것을 자기 시에서 다루고 있다.
2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예세닌은 훌륭한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의 재능은 서정시에서 특히 선명하게 발견된다. 그는 강한 시적(詩的)인 자아 발견이라는 비길 데 없는 재주, 그리고 마음속에 일어난 정답고 친밀한 분위기와 가장 섬세한 뉘앙스를 포착하여 전달하는 재주를 가졌다.
사랑하는 고향 땅이여! 내 가슴은
호수 한복판 속 태양의 건초더미를 꿈꾼다.
수백 가지 소리 들리는 너의 푸르름 속에서
나는 넋을 잃고 싶어라.
이루 말할 수 없는, 푸른, 보드라운…
폭풍우 뒤에, 뇌우(雷雨) 뒤에 나의 고향 땅은 조용하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 끝없는 들판 -
꿀과 장미 냄새를 맡는다.
연못 속에 비친 자작나무, 타작마당을 치우는 늙은 할아버지의 턱수염에 해 그림자가 비치는 것 등…
민중시적 형상의 세계가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풀담요 속에서 나는 노래와 더불어 태어났다.
봄의 여명이 나를 무지개로 감싸주었다.
나는 성숙기까지 자랐다, 요한 축일 밤의 손자,
마녀가 나에게 행운을 예언했다.
고향에 대한 사랑, 아주 생생하고 정확한 비유로 표현된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감정, 주위의 아름다움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는 데 대한 슬픔, 그리고 인간이 일생에 단 한번 도달하는 비길 데 없는 매력 속에 용해되는 듯한 희망이 그의 시속에는 들어 있다.
새벽의 모닥불, 파도소리, 은빛 달, 갈대소리, 드넓은 하늘, 푸르른 호수 수면 - 세월이 흐를수록 고향의 온갖 아름다움과 러시아 땅에 대한 풍만한 사랑이 시 속에 쏟아졌다.
오, 러시아여 - 산딸기의 들판
그리고 강에 내려앉은 푸른빛이여, -
기쁘고 아플 때까지 나는
너의 호수의 우수를 사랑하리라….
그의 모든 작품에는 강한 서정시 풍이 스며들어 있다. 조국의 운명과 자연에 대한 시에도, 사랑의 시에도.
예세닌에게 있어서 자연은 움직이지 않는 풍경의 배경이 아니라, 늘 살아 움직이며 인간의 운명과 역사적 사건에 뜨겁게 반응한다. 자연은 시인이 좋아하는 주인공이다.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숄로호프의 자연 풍경 속에서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과 비슷한 무엇인가가 예세닌의 자연 속에는 들어 있다. 예세닌의 언어 회화의 기술은 모두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 창조력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하려는 한 가지 목적에 바쳐져 있다.
자연묘사에 민요를 많이 이용하고 있는 예세닌은 종종 다음과 같은 의인법을 쓰고 있다-벚꽃이 "흰 망토를 입고 잔다", 버드나무 가지가 "울고 있다", 포플러가 "소곤댄다", "졸린 대지가 태양에게 미소 짓는다", "눈보라가 집시의 바이올린처럼 흐느낀다"느니 하는 등.
예세닌의 시적 재주, 그의 작품의 사상, 미학적 의미, 국민시의 전통과 러시아 고전과의 밀접한 관계가 그의 시 속에 점차 충분히 그려져 나아갔다. 어렸을 때 처음 『이고리 군기(軍記)』를 읽고서 강한 인상을 받았고, 러시아 영웅서사시, 레르몬토프와 네크라소프, 니키친과 콜리쏘프, 페트와 쮸체프의 시를 암송하기도 한 그에게는 푸시킨과 고골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 예세닌은 자기식으로 개조하기는 했지만 블로크를 통해 집시-로맨스 모티프를 파악하였고, 벨르이에게서 현대의 종교적 상징뿐만 아니라 시의 운율을 배웠으며, 그의 문학 발달에 있어서 클류예프의 영향관계는 특히 중요하다.
후기에는 더욱더 푸쉬킨의 소박함에 끌렸는데, 「페르시아 모티프」 「어머니에게 부치는 편지」 「어떤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 「귀향」 등에서는 이 점이 분명히 느껴진다. 예세닌의 서정시에서 형용사 어구, 비유, 은유는 형식을 위함이 아니라 사상과 내용을 좀 더 충분하게, 좀 더 깊이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현실성, 구체성, 감성은 구성에 있어서의 특징이며, 형상의 형이하학에로의 지향-이것은 그의 문체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모멘트 가운데의 하나이다. 감정과 언어, 사상과 형상의 놀라운 하모니, 시의 외형과 내적 감동의 통일은 가히 압도적이라 하겠다.
3
예세닌의 시대는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대변혁의 시기였다. 과거로 물러난 가부장적 러시아, 차리즘에 의해 세계대전의 구렁텅이로 휩쓸려 들어간 러시아로부터 혁명에 의해 변화된 러시아, 레닌의 러시아, 소비에트 러시아로-시인이 조국과 함께, 국민과 함께 간 역사의 길이 이러했다.
10월 혁명에 대한 예세닌의 태도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별된다. 첫째, 소비에트 정권의 정치적 인정과 혁명에 동조, 둘째,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본질의 현실적 인식, 레닌의 당 정책·계급투쟁의 성격·사적 유물론 철학의 이해.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당시 진보적 작가들에게만 존재했던 높은 사상발달의 수준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혁명시기에는 완전히 10월 혁명 편이었으나, 모든 것을 자기 나름으로 농민 쪽에 서서 받아들였다"-라고 예세닌은 「자신에 대하여」라는 자서전적인 글에서 말하고 있다. 이 '농민편향'은 시인의 세계관의 주관적 측면의 표현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 그의 견해 속에 나타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순이 그의 정신분열증과 개성으로만 설명된 적이 있었으나, 이 모순은 현실적인 생활현상에 대한 깊고도 진지한 반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예세닌의 시는 아주 드라마틱하고 진실하며, 심한 갈등과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깊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혁명 초기에 예세닌은 자연을 예술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 인생과 다른 미학적인 문제에 대한 시의 관계에 특별한 흥미를 가졌었다. 그러나 시인의 사상·예술의 발달은 1919년부터 시작된 그의 작품에 끼친 이미지스트들의 유미주의적 문학 경향의 영향으로 억제되었다. 이미지스트들과 가까워지면서 예세닌은 자신의 미학원칙이 그들의 창작의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이미지스트들의 형식주의 작품은 예세닌의 시와는 퍽 달랐다. 그도 곧 이 사실을 감지해 1921년 봄, 이렇게 썼다. "내 동료들은 예술이란 예술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그들은 화를 낼 것이다. 그와 같은 예술접근은 진지하지 않다고… 그들에게는 조국애가(이 말의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없다…."
서정시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밝고 아름다운 것들과의 갈등, 특히 혁명 이상과의 갈등 속에서 그는 놀랍도록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새로운 인간이 아니다!
숨길 게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한쪽 다리로 과거 속에 남았다,
다른 한쪽 다리로 강철의 군대를 따라잡으려고 하면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있다.
「목로술집 같은 모스크바」 (1921∼24) 계열의 일련의 시에서는 정신적 타락, 심각한 창작 위기의 증거로 혁명의 힘에 대한 불신을 토로하고 낙오된, 사회적으로 황폐해진 인간의 형상을 그리고 있다.
이제 나는 어머니에게가 아니라
생판 남인 웃음이 헤픈 인간쓰레기에게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니다! 돌에 걸려 넘어졌다,
내일이면 다 나을 것이다!"
동시에 시인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의미를 알고자 한다.
오, 만약에 이 나무이파리들처럼,
깊은 곳에서 두 눈에 의해 싹이 틀 수 있다면.
이 시기의 몇몇 작품은 퇴폐, 세상에 대한 방종한 태도, 난폭하고 무뢰함을 지칭하는 '예세닌주의'라는 용어를 나타나게 한 동기가 된다. 당시의 진보적인 비평은 예세닌과 '예세닌주의'를 분리시키려 하였다. 예세닌은 러시아 농민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는데, 바로 이점이 그가 국민시인, 민중시인이 될 수 있게 하여 주며, 선명한 사실주의 작품에서 자기 시대의 주요 사건들에 대해 말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농민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 - 사회주의의 길이 역사에 의해 러시아에 주어졌다. 예세닌은 이것을 이성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감성으로는, 러시아 농민이 그 길 위에 서기란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음을 느꼈다. 이 때문에 미래의 농촌에 대한 예세닌의 고뇌가 있다.
들판의 러시아여! 들판을 따라
나무쟁기를 질질 끌고 가는 것이 만족스럽구나!
자작나무들도 포플러나무들도
나의 빈곤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나는 모른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어쩌면 나는 새로운 생활에 맞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강철처럼
불쌍하고 빈곤한 러시아를 보고 싶다.
4
마야코프스키와 함께 예세닌은 전 소비에트 시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시인이다.
30년대 중반 루마니아에서 예세닌의 시가 번역되어 나오자 진보적인 신문 휴머니즘은 "고통받는 이, 폐허 속에 살고 있는 이, 공장과 항구에 흩어져 있는 이, 사회 정의를 사랑하고 훌륭한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 의해 읽혔다"라고 평했다.
다시 말해서 당시 부르주아적인 루마니아에서 예세닌은 사회통신으로, 자신의 논문 (1955.12.15)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네 명의 러시아 작가가 후기 이탈리아 문학 전체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 네 작가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그리고 예세닌이다."
프랑스 작가 루이 아라공은 『프라브다』지(1925.10.21)에 세계의 빛나는 시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 러시아에는 마야코프스키와 예세닌이 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예세닌이 죽었을 때(1925.12.28) "가장 위대한 시인이 죽었다… 그의 시는 마치 그의 마음의 보물을 두 줌 뿌린 것과 같다"라고 쓰고 있다.
예세닌의 비극적인 종말은 이와 비슷한 종말이 거의 모두 그러했듯이 일련의 상황의 결과이다. 그 상황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가는 동안 부닥친 생활의 어려움 앞에서의 무방비성이었다. 예세닌은 몹시 감수성이 강한 시인이었으므로, 어쩌면 갑작스레 나타난 고통·실망·정신적인 피로의 영향을 받아 생명을 끊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