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세닌과 오장환

오장환 번역 <예세닌 시집>과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by 김양훈
오장환이 번역 출간한 「예세닌 시집」(1946)에 수록된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1924)는 당시 해방 공간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작품이다. 이 시는 고향을 떠나 도시의 방탕과 타락 속에 몸을 던진 아들이, 먼 시골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참회록이자 절규다.
오장환은 예세닌의 시를 자신의 서정적 필체로 옮기며, 방랑하는 시인의 고독을 극대화했다. 아래는 오장환이 번역(일본어 중역)한 예세닌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전문이다. 2000년대 들어 러시아어 원문을 번역한 시 구절보다 더 감칠맛이 나는 것 같다.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세르게이 예세닌

아직도 살아 계셔요, 나의 늙으신 어머님?

나도 살아 있어요. 문안드려요.

저녁놀이 비치는 당신의 오두막 위에

변함없는 그 찬란한 빛이 쏟아지게 하소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수심에 잠겨 나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신다지요?

낡아빠진 케네츠¹를 걸치시고

자꾸만 한길가로 나가신다지요?

저녁때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똑같은 광경이 눈에 삼거려

견딜 수 없으시겠지요.

누군가가 선술집 싸움 끝에

내 심장에 핀란드 칼을 꽂는 그런 광경 말여요.


어머님, 안심하셔요.

그건 다만 괴로운 꿈일 뿐이어요.

나는 그렇게 죽어버릴 만큼

지독한 술꾼은 아니랍니다.

당신을 뵙기 전엔 결코 죽지 않겠어요.

나는 옛날처럼 다정스러워요.

나의 유일한 꿈은 어서 바삐

이 지긋지긋한 고독을 떨쳐버리고

우리들의 낮은 지붕 밑으로

돌아가는 것이랍니다.


우리들의 동산에 흰 꽃이 만발할 이른 봄이면

나는 돌아가겠어요.

하지만 8년 전처럼 새벽녘에

나를 깨우지는 말아 주셔요.

이미 지나간 일들을 일깨우지는 말아 주셔요.

이루지 못한 꿈을 들추지도 마시고

젊은 날에 겪었던 그 시련들도 일깨우지 마셔요.

나는 너무 일찍 피로해졌고 손실을 입었답니다.

내 인생엔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요.


나에게 기도를 가르치려 하지 마셔요.

필요 없답니다!

옛날로 돌아갈 길은 이미 끊겼어요.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며 기쁨,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찬란한 빛이랍니다.

그러니 어머님, 수심을 잊으셔요.

나 때문에 너무 괴로워 마셔요.

낡아빠진 케네츠를 걸치시고

자꾸만 한길가로 나가지 마셔요. (1924)

[註1] 케네츠: 러시아 겉옷으로 추정됨, 오장환이 번역한 예세닌의 시에 등장하는 '케네츠'는 러시아의 전통 의상인 슈슈(Shushu, Шушун)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어 원문에서는 이 옷을 '슈슈(shushun)'라고 부르는데, 오장환이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어 역본이나 당시의 중의적 번역 과정에서 음차(音借) 혹은 오역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판본에서는 '슈슈'를 '슈슈ㄴ'으로 읽다가 '케네츠'와 유사한 발음으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르게이 예세닌
피로한 보헤미안의 귀향과 절망;
방랑하는 탕아의 고백

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정서는 '피로'와 '회귀'이다. 예세닌은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자신의 처지를 '선술집 싸움에서 칼을 맞는 환상'으로 묘사한다. 오장환은 이 부분을 번역하며 식민지 말기와 해방 초기의 극심한 혼란을 겪은 조선 지식인의 실존적 공포를 투영했다. "나는 너무 일찍 피로해졌고 손실을 입었답니다"라는 구절은 예세닌의 고백인 동시에, 시대를 앓았던 오장환 자신의 독백이기도 하다.

종교적 구원을 대신하는 '어머니'

시인은 "기도를 가르치려 하지 마셔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는 기성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줄 수 없는 구원을 오직 '어머니(고향)'라는 근원적 존재에게서만 찾으려는 태도이다. 오장환에게 있어 이 '어머니'는 상실한 조국일 수도, 혹은 병든 육신을 뉘일 최후의 안식처일 수도 있다. 오장환은 예세닌의 이 시를 통해 목적의식에만 매몰된 당대 문학판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슬픔의 가치를 역설한다.

시인 오장환(1918 ~ 1951)
오장환시인은 백석, 이용악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난 오장환시인은 1951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오장환시인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정지용시인에게서 시를 배웠다.
휘문고등학교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교지 《휘문》에 「아침」,「화염」과 같은 시를 발표하고,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어려서 박두진시인과는 안성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일본 지산중학에 유학하고 온 뒤부터는 서정주, 김광균, 이육사 시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오장환적 문체의 미학

오장환의 번역은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애상적이다. "나도 살아 있어요. 문안드려요" 같은 평어체의 사용은 시적 대상(어머니)과의 거리를 좁히며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는 예세닌의 원문(일본어 번역문)을 한국적 정서인 '한(恨)'과 결합시켰다. 낡은 옷을 입고 길가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한국 독자들에게 예세닌을 러시아인이 아닌, 바로 우리 곁의 이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결론

오장환이 번역한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는 단순한 번역 시가 아니라,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한 예술가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다. 오장환은 이 시를 통해 자신의 보헤미안적 기질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돌아갈 수 없는 과거(순수했던 고향)에 대한 영원한 노스탤지어를 완성했다.


오장환의 펴낸 <예세닌 시집>에 관하여

오장환이 1946년 아문각(雅文閣)에서 펴낸 <예세닌 시집>은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번역 시집이다. 이는 단순히 외국 시를 소개한 것을 넘어,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지식인들이 가졌던 고뇌와 지향점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주요 특징과 문학적 의의를 네 가지 핵심 포인트는 아래와 같다.

1. '조선의 예세닌'을 꿈꾼 오장환의 투사

오장환은 세르게이 예세닌을 '혁명의 시인'이자 '농촌의 아들'로 규정했다.

•공통된 감수성: 오장환은 일제강점기 황폐해진 조선의 농촌을 목격하며 자란 시인이었다. 그는 예세닌이 러시아 혁명기 속에서 잃어버린 고향과 자연을 노래하며 겪은 상실감에 깊이 공감했다.

•자아의 확장: 번역 서문에 나타나듯, 오장환은 예세닌의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적 고통과 방황을 위로받으려 했다. 즉, 이 시집은 단순한 번역을 넘어 오장환 시 세계의 연장선으로 평가받는다.

2. 해방 공간에서의 정치적·문학적 상징성

1946년은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소련 문학의 수용: 당시 오장환을 비롯한 '조선문학가동맹' 계열의 문인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의 모델로 소련을 주목했다. 예세닌은 소련의 대표적인 민중 시인이었기에, 그의 시를 번역하는 행위 자체가 진보적 문학 운동의 일환이었다.

•서정적 리얼리즘: 오장환은 딱딱한 구호 위주의 선전 시보다는 예세닌의 섬세하고 서정적인 언어를 빌려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3. 시집의 구성과 번역의 특징

이 시집에는 예세닌의 대표작인 <소련 러시아>, <술꾼의 노래>,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중층 번역의 한계와 성과: 당시 러시아어를 직접 번역하기 어려웠던 환경 탓에 오장환은 주로 일본어 역본을 중문(重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장환 특유의 유려하고 애상적인 문체 덕분에 예세닌 특유의 '보헤미안적 슬픔'이 한국어로 훌륭하게 재현되었다.

•비극적 미학: 시집 전반에는 혁명에 환호하면서도 그 거대한 변화 속에서 소외되는 개인의 비극적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4. 두 시인의 운명적 조우

흥미롭게도 예세닌과 오장환은 삶의 궤적이 매우 닮아 있다.

•요절과 방랑: 예세닌은 30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오장환 역시 월북 후 34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경계인으로서의 고통: 두 사람 모두 혁명(혹은 해방)이라는 거대 서사에는 찬성했으나, 그 과정에서 파괴되는 서정성과 인간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했던 '경계인의 고독'을 공유하고 있었다.

•요약: <예세닌 시집>이 갖는 의미

이 시집은 한국 문학사에서 외국 문학이 수용자의 내면과 어떻게 결합하여 새로운 문학적 에너지를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준다. 오장환은 예세닌을 통해 '병든 서울'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꿈꿨지만, 동시에 그 속에 내재된 근원적인 슬픔을 놓지 않았다.


오장환과 예세닌
혁명의 노스탤지어와 보헤미안의 비극

한국 근대 시사에서 오장환(吳章煥)은 '시인의 시인'이자, 가장 뜨거웠던 모더니스트였으며, 동시에 고독한 보헤미안이었다. 1930년대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3천재'로 불렸던 그는 당대 그 누구보다도 서구 문학의 정수를 빠르게 흡수하면서도, 그 뿌리에는 상실된 고향에 대한 비애를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1946년 번역 시집 <예세닌 시집>을 펴내며 러시아의 천재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을 조선의 독자들에게 소개한 일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문학적 공명(resonance)을 의미한다.

1. 시적 유대: '농민의 아들'과 '보헤미안'의 만남

오장환이 예세닌에게 매료된 일차적인 이유는 두 사람의 출생 배경과 시적 출발점의 유사성에 있다. 예세닌은 러시아 혁명기 '마지막 농촌 시인'을 자처하며 파괴되어 가는 농촌의 아름다움과 그 소멸을 노래했다. 오장환 역시 초기작 <성벽> 등을 통해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황폐해진 고향의 풍경을 목격하며 그 상실감을 '병든 서울'의 이미지와 대비시켰다.

오장환에게 예세닌은 단순한 타국의 시인이 아니었다. 급변하는 시대적 격랑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영혼의 동반자'였다. 예세닌이 혁명 후 기계 문명에 밀려나는 농촌의 비극을 목격하며 방황했듯, 오장환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모더니즘적 감수성과 향토적 비애 사이의 분열을 겪었다.

2. 혁명의 열정과 그 이면의 고독

1945년 해방 이후 오장환의 행보는 급격히 변화한다.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을 시에 담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그가 예세닌의 시를 번역했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예세닌은 볼셰비키 혁명을 찬양했으나, 정작 혁명이 가져온 경직된 질서와 기계적인 전체주의에는 적응하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장환은 예세닌의 시에서 혁명의 격정과 동시에 개인이 느끼는 실존적 허무를 동시에 발견했다. 오장환이 번역한 예세닌의 시구들은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지식인들이 느꼈던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대변하는 도구가 되었다.

3. '예세닌 시집'의 문학적 층위: 번역인가, 투사(投射)인가

오장환의 <예세닌 시집>은 한국 문학사에서 외국 시인의 시집이 단독으로 번역 출판된 드문 사례다. 여기서 오장환은 예세닌의 시를 단지 한국어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적 언어를 예세닌의 목소리에 투사한다.

그가 선택한 시들은 대개 서정적이면서도 격정적이며,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자기 파괴적인 방랑의 기운이 서려 있다. 이는 오장환 자신이 겪었던 가족의 해체, 건강의 악화,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느낀 고통과 맞닿아 있다. 즉, **오장환의 예세닌은 '조선의 예세닌'이자 '오장환의 또 다른 자아'**였던 셈이다.

4. 비극적 종말의 미학

예세닌은 30세의 나이로 레닌그라드의 한 호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오장환 역시 월북 이후 북한 체제 내에서의 비판과 지병(신장병)의 악화로 인해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두 시인 모두 시대의 불협화음을 온몸으로 감당하다가 요절했다는 점은 그들의 문학적 친연성을 더욱 비극적으로 완성한다.

오장환에게 예세닌은 도달하고 싶은 혁명의 순수성이자, 동시에 결코 안주할 수 없는 시인의 숙명적인 고독을 확인시켜 준 거울이었다. 오장환이 예세닌을 통해 보여준 감수성은 당대 좌익 문학이 빠지기 쉬웠던 경직된 목적의식 문학을 넘어서, 인간의 근원적인 비애와 서정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론: 시대를 앓는 시인의 초상

오장환이 펴낸 <예세닌 시집>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라, 20세기 중반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두 시인의 정신적 교감의 기록이다. 오장환은 예세닌의 시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고, 예세닌의 비극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오장환을 읽는 것은, 그가 예세닌에게서 발견했던 '파괴되어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한 동경'이 여전히 우리 삶의 근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예세닌이라는 창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고, 우리는 오장환이라는 창을 통해 그 뜨거웠던 시대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시집 헌사

절정의 노래

오장환


탑이 있다.

누구의 손으로 쌓았는가, 지금은 거칠은 들판

모두 다 까맣게 잊혀진 속에

무거운 입 다물고 한없이 서 있는 탑,

나는 아노라. 뭇 천백 사람,미지와 신비 속에서

보드라운 구름 밟고

별과 별들에게 기울이는 속삭임.


순시(瞬時)라도 아, 젊은 가슴 무여지는

덧없는 바래옴

탑이여,하늘을 지르는 제일 높은 탑이여!

언제부터인가

스사로 나는 무게, 아득한 들판에

흘로 가없는 적막을 누르고…


몇 차례나 가려다는 돌아서는가.

고이 다듬는 끌이며 자자하던 이름들

설운 이는 모두 다 흙으로 갔으나

다만 고요함의 끝 가는 곳에

이제도


한층 또 한층 주소로

애처로운 단념의 지붕 위에로

천년 아니 이천 년 발돋움하듯

탑이여,머리 드는 탑신이여, 너 홀로 돌이여!

어느 곳에 두 팔을 젓는가.


<시집 '나 사는 곳'>(1947)

복원한 오장환의 생가

오장환(吳章煥, 1918-1951)은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 또는 삼재(三才)로 불렸다.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였으나,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던 중 월북했다.

그는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오학근(吳學根)과 후처 한학수(韓學洙)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7살이 되던 1924년 회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 4월 30일 회인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5월 2일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박두진과 같은 반이었다. 5학년이 되던 1928년 동시 〈밤〉을 교내 학예부 아동문집에 실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중동학교 속성과를 수료하였으며, 14살이 되던 1931년 4월 1일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정지용을 사사(師事)하였다. 문예반에서 활동하며 1932년 《매일신보》에 〈조선의 아들〉과 〈발자취 찾아〉를 발표하였고, 교지 《휘문》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다가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실으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유학과 방랑

1935년 1월 26일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같은 해 4월 도쿄에 있는 지산 중학교(智山中學校)에 전입하였고,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그는 1930년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경향을 따르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 11월 《낭만》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인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제작을 주도하였다. 그 해에 첫 시집 《종가》를 출판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검열로 무산되었다. 1937년 메이지 대학 전문부 문과 문예과 별과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그는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첫 시집 《성벽》을 자비출판하였다. 시론과 작가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7월 22일 아버지 오학근의 사망으로 메이지 대학을 중퇴하고 급히 유학을 마쳤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경성부 관훈정에 남만서방(南蠻書房)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차리고, 그곳에서 다양한 문인과 교류하였다. 두 번째 시집 《헌사》(1939년), 서정주의 《화사집》(1938년), 김광균의 《와사등》 모두 이곳에서 출판하였다. 1940년경에는 중국 일대를 방랑하다가 경성부 돈암정 105번지로 이사하였다. 1940년-41년에는 도쿄에서 사자업(寫字業)을 하며 가난하게 지냈고, 황달, 두통, 늑막염, 신장병 등을 앓았다. 수술 결정을 앞두고 있어 외출이 금지되었던 병상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와 월북

1945년 10월 22일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다. 1946년 5월 동향사에서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을, 같은 해 7월 정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하였다. 1946년 12월 19일 장정인(張正仁)과 결혼하였다. 1947년 1월 아문각에서 6편의 시를 추가한 《성벽》의 개정 증보판을, 같은 해 6월 헌문사에서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좌익 계통에서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7년 6월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문화 대중화 운동인 문화공작대에 참여하여 경상남도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국가의 검열과 공연 중지 시도, 그리고 폭탄 테러 등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고, 그 자신은 테러 피해를 입어 상해를 입고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에 치료와 이념 실현을 위하여 1947년 9월 이후 월북하였다. 월북 시기가 분명치 않은 것은 당시 오장환이 조선문학가동맹 등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테러로 다쳤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등 몇 차례 남북을 오간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1948년 7월에 조선인민출판사에서 《남조선의 문학예술》을 출판하였고,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포의 소련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48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모스크바의 시립 볼킨병원에서 요양하였다.

1950년 5월 소련 생활 당시의 체험을 담은 마지막 시집 《붉은 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출판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잠시 서울로 와 이전에 만났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알려진 오장환의 마지막 작품은 《조선여성》 1951년 5월호에 실린 〈시골길〉로,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1년 한국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성벽》(1937년), 《헌사》(1939년), 《병든 서울》(1946년), 《나 사는 곳》(1947년), 《붉은 기》(1950년) 등이 있다. 이 중 《병든 서울》은 조정래의 역사소설 《태백산맥》에 발췌되었다. 1982년 군산에서 발생한 간첩 날조 사건인 '오송회 사건'은 고교 교사들이 《병든 서울》을 돌려 읽은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위키백과>


병든 서울

오장환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아, 저마다 손에 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 부르며

이것도 하루아침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이 먼지를 씌워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그렇다. 병든 서울아,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모두 다 술 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아 다정한 서울아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

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들 청춘의 반항은

이러한 것이었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눈물나게 신명나는 일이냐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들은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나온다.

포장 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구융같이 늘어선

끝끝내 더러운 거릴지라도

아,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8월 15일, 9월15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이…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 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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