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눈을 밟고 거닌다

by 세르게이 예세닌

by 김양훈

나는 첫눈을 밟고 거닌다

세르게이 예세닌


나는 첫눈을 밟고 거닌다,

마음속에는 확 불타오른 힘의 은방울꽃.

바람이 나의 길 위에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켰다.

나는 모른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수풀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바람인지 수탉인지?

어쩌면 그것은 들판에 겨울이 오지 않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은 것이리라.


오 하얀 설원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게 하고 있다!

못 견디게 내 몸뚱이로 꼭 끌어안고 싶어 지누나

자작나무의 드러난 가슴을.


오, 숲의 조는듯한 뿌연함이여!

오, 눈에 덮인 밭의 쾌활함이여!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어지누나

버들의 나무 허벅지 위에서. (1912-1918)


by James FrenchPeter(Pinterest)

[詩評]

세르게이 예세닌의 「나는 첫눈을 밟고 거닌다」는 그의 시적 고향인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화자의 생명력이 완벽하게 합일된 순간을 노래한 찬가다. 1912년에서 1918년 사이에 쓰인 이 시는 예세닌이 청년기를 보내며 느꼈던 존재론적 희열과 자연에 대한 육체적 애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앞서 살펴본 「지는 해의 붉은 날개」가 이별의 아픔을 관조적으로 수용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연인 앞에 선 청년의 '폭발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1. 감각의 전이와 환상적 풍경 (1~2연)

시의 시작은 '첫눈'을 밟는 촉각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화자의 내면은 역설적으로 "확 불타오른 힘의 은방울꽃"으로 가득 차 있다. 차가운 눈 위를 걷고 있음에도 심장에서는 뜨거운 생명력의 꽃이 피어나는 이 대비는 시 전체를 관통하는 활력의 원천이다.

특히 2연에서 보여주는 "빛인지 어둠인지", "바람인지 수탉인지" 모를 모호함은 혼란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이 마비될 정도의 황홀경을 의미한다. 들판에 내린 눈을 '백조'들이 내려앉은 것으로 치환하는 대목은 예세닌 특유의 전원주의적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차가운 겨울의 서막인 첫눈을 따스한 생명을 품은 백조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연을 향한 화자의 깊은 애정을 읽을 수 있다.

2. 자연과의 육체적 합일: 범신론적 에로티시즘 (3~4연)

이 시의 가장 파격적이고 아름다운 지점은 자연을 대하는 화자의 방식이다. 화자는 단순히 눈 덮인 풍경을 감상하는 관찰자에 머물지 않는다.


"못 견디게 내 몸뚱이로 꼭 끌어안고 싶어지누나

자작나무의 드러난 가슴을."


여기서 자작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드러난 가슴'을 가진 생명체로 의인화된다. 버드나무의 가지는 '나무 허벅지'로 묘사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자연을 향한 예세닌의 감정이 관념적인 차원을 넘어 매우 육체적이고 관능적임을 보여준다. 차가운 추위가 오히려 피를 덥게 만든다는 역설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와 살을 맞대고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화자의 '범신론적 열망'을 드러낸다.

3. '쾌활함'으로 승화된 고독과 겨울

러시아의 겨울은 본래 혹독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예세닌의 시 속에서 설원(雪原)은 "쾌활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시인이 인간 사회의 번잡함이나 정치적 격변(당시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에서 벗어나, 변하지 않는 대지의 순수함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았음을 뜻한다.

"조는 듯한 뿌연함"과 "쾌활함"이 공존하는 숲의 풍경은 화자의 평온한 내면을 반영한다. 그는 첫눈이 내리는 이 순간, 세상에 홀로 서 있지만 외롭지 않다. 자작나무와 버드나무가 그의 연인이 되어주고, 바람이 그의 길을 밝히는 촛불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총평: 대지의 품에 안긴 청춘의 사자후

「나는 첫눈을 밟고 거닌다」는 예세닌이 왜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자 '마지막 농촌 시인'으로 불리는지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그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단순한 배경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자연은 함께 숨 쉬고, 껴안고, 사랑을 나누어야 할 실존적 동반자였다.

이 시는 독자들에게 차가운 현실(첫눈) 속에서도 내면의 뜨거운 불꽃(은방울꽃)을 피워낼 수 있는 힘을 전한다. 자작나무의 흰 껍질을 여인의 살결처럼 느끼는 그 섬세하고도 대담한 감수성은, 메마른 현대인의 정서에 대지의 생명력을 수혈해 준다. 예세닌은 이 시를 통해, 인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연의 박동과 나의 심장 소리가 일치될 때임을 알리고 있다.


「지는 해의 붉은 날개」와
「나는 첫눈을 밟고 거닌다」
은빛 자작나무의 시인,
예세닌이 건네는 고독과 생명의 위로

러시아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는 세르게이 예세닌을 가리켜 “대지가 낳은 천재”라 칭송했습니다. 예세닌의 시는 러시아의 흙냄새와 눈 덮인 숲의 정취를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1910년대에 쓰인「지는 해의 붉은 날개」와「나는 첫눈을 밟고 거닌다」는 상실의 아픔을 견디는 법과, 자연과 합일되어 얻는 생의 환희라는 시인의 두 가지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 상실의 수용: 아픔을 세월에 누이는 지혜

「지는 해의 붉은 날개」는 저녁노을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는 농촌의 적막함 속에서 시작된다. 이 시에서 '붉은 날개'의 소멸은 화자가 겪는 사랑의 종언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원망하거나 절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러워하지 마라, 나의 하얀 집이여"라며 자신의 고독을 객관화하고 위로한다.

문학평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시의 핵심은 '시간의 정화 작용'에 있다. "세월은 불안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라는 깨달음은,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퇴적시키는 성숙한 태도를 보여준다. 나아가 시인은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의 아이를 안고 돌아올 여인을 상상한다. "어린애는 나를 닮았노라고" 말하는 마지막 대목은, 육체적 소유를 넘어선 영혼의 유대를 긍정함으로써 이별의 비극을 용서와 자애로 승화시키는 시적 도약을 이뤄낸다.

2. 자연과의 합일: 대지가 내뿜는 관능적 생명력

반면 「나는 첫눈을 밟고 거닌다」는 차가운 겨울의 문턱에서 오히려 뜨겁게 타오르는 청춘의 생동감을 노래한다. 여기서 첫눈은 소멸이나 추위의 상징이 아니다. 화자의 마음속에는 "힘의 은방울꽃"이 불타오르고, 설원은 "백조들이 내려앉은 풀밭"으로 변모한다.

이 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자연을 향한 육체적 접근이다. 예세닌에게 자연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뜨거운 심장을 가진 연인이다. 그는 자작나무의 하얀 줄기를 "드러난 가슴"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나무 허벅지"로 묘사하며 이를 꼭 껴안고 싶어 한다. 이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 슬라브적 세계관의 부활이며, 도시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생명력을 향한 사자후와 같다.

3. 자작나무: 러시아 영혼의 영원한 초상

두 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자작나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자작나무는 단순한 나무를 넘어 '러시아의 여인', '순결한 영혼', 그리고 '고향의 대지'를 상징한다.

예세닌은 자작나무를 통해 이별의 아픔을 달래고(하얀 집), 자작나무의 몸을 빌려 생의 열망을 표출한다. 그에게 자작나무는 슬픔을 함께 견디는 동반자이자, 혹독한 겨울(현실) 속에서도 눈부신 흰색(순수)을 잃지 않는 러시아인의 자화상이었다.

겨울의 끝에서 만나는 따뜻한 등불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평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한 가지 진실에 도달한다. 삶은 때로 지는 해의 붉은 날개처럼 허망하게 사라지기도 하고, 첫눈처럼 차갑게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세닌은 그 모든 순간 속에는 '의젓한 힘'과 '불타는 은방울꽃'이 숨겨져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시는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보드카 한 잔이라고나 할까. 차가운 눈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우리 곁에는 언제나 가슴을 내어줄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는 사실을 그는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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