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

by 벨라 아흐마둘리나

by 김양훈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

벨라 아흐마둘리나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

나에게 질문도 던지지 마세요

착하고 믿음직한 눈길로

내 손을 어루만지지 마세요.


봄날에 웅덩이를 건너며

내 발자국 뒤쫓지 마세요.

난 알고 았어요, 이 만남 또다시

부질없는 것임을.


당신은 내가 오만하여

당신과 사귀지 않는다고 생각하시죠?

오만함이 아니라 슬픔 때문에

나 이토록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데.

(1958)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이명현 엮고 옮김) 창비세계문학 35


Bela (Isabella) Ajátovna Ajmadúlina
벨라 아흐마둘리나:
시대의 소음 속에서 피어난 은색 목소리

벨라 아흐마둘리나(1937-2010)는 이른바 '스탈린 사후 해빙기'를 상징하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시인이다. 예브투셴코(그녀의 첫 남편이기도 함), 보즈네센스키와 함께 1950~60년대 러시아 시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동료들이 사회적·정치적 메시지에 집중할 때 그녀는 철저히 개인의 고독과 언어의 미학적 순수성에 침잠했다.

•혈통과 배경: 타타르족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동양적 신비로움과 서구적 지성이 결합한 독특한 아우라를 지녔다. 그녀의 시 낭송은 흡사 노래하는 듯한 리듬과 떨림이 있어 당대 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고전의 계승: 그녀는 푸시킨, 아흐마토바, 츠베타예바의 계보를 잇는 '정통 서정시'의 수호자였다. 구소련의 경직된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그녀는 정치적 구호 대신 인간 영혼의 미세한 파동을 포착하는 데 주력했다.

•저항과 고립: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스테르나크가 탄압받을 때 그를 옹호하다 대학에서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말년까지 러시아 문학의 도덕적 양심으로 남았다.


[시평]

고독을 선택한 이의 처절한 자존감: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

거부의 미학: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이 시의 첫 구절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하는 정서는 '단호한 거절'이다. 화자는 상대방에게 시간도, 질문도, 다정한 손길도 내주지 말라고 요청한다. 이는 상대가 미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만남이 가져올 필연적인 파국과 '부질없음'을 이미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서정시가 사랑의 결실을 노래하거나 이별의 슬픔을 토로한다면, 아흐마둘리나는 '시작조차 거부하는 사랑'을 노래한다. 이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격리하는 현대적 인간의 방어기제인 동시에, 타인에 의해 훼손되지 않으려는 영혼의 결벽성을 보여준다.

•슬픔의 역설: "오만함이 아니라 슬픔 때문에"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연에 있다. 세상을 향해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화자의 태도를 사람들은 '오만함'이라 오해한다. 하지만 화자는 고백한다.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슬픔' 때문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슬픔'은 단순히 개인적인 연애의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Ontological Solitude)에 가깝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을 때, 인간은 역설적으로 고개를 더 높이 쳐들게 된다. 아흐마둘리나는 이 시를 통해 슬픔이 어떻게 인간의 품위(Dignity)로 치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공간과 시간의 배치

•봄날의 웅덩이: 생명이 시작되는 '봄'과 질척거리는 '웅덩이'의 대비는 희망과 현실의 괴리를 나타낸다. 내 발자국을 뒤쫓지 말라는 요구는 나의 고통과 고독의 길에 타인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부질없는 만남: 화자는 만남의 끝을 이미 알고 있다. 이는 1950년대 말 구소련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들이 느꼈던 무기력함과도 맞닿아 있다. 어떤 소통도 진실에 닿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시 전반에 깔려 있다.

문학사적 의미: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방식

벨라 아흐마둘리나의 시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슬픔의 귀족주의'를 확립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녀에게 시는 고통을 배설하는 창구가 아니라, 고통을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형식(운율과 언어) 속에 가두어 보석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학적 가치를 지닙니다.

•여성 시적 화자의 주체성: 수동적으로 사랑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적 경계를 직접 설정하고 거절을 주도하는 강인한 내면을 보여준다.

•언어의 절제: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며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그 행간 속에 더 큰 감정적 파고를 숨겨두었다.

•시대적 공명: 1958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국가라는 거대 서사보다 '개인의 고통과 자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명했다.


Boris Pasternak
파스테르나크와 아흐마둘리나
1. 파스테르나크와의 운명적인 만남:
"당신은 시의 신이 보낸 선물입니다"

아흐마둘리나가 고리키 문학대학교 학생이던 시절, 그녀는 이미 파스테르나크를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고 있었다.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당국의 감시 속에 모스크바 근교의 작가 마을인 페레델키노(Peredelkino)에 은둔 중이었다.

젊은 아흐마둘리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집을 방문했고, 파스테르나크는 그녀의 시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흐마둘리나의 독특한 음색과 고전적인 품격에 매료되어 "당신은 러시아 시가 잃어버렸던 순수성을 되찾아주었다"라며 극찬했다. 이후 파스테르나크는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자주 초대하며 문학적 교감을 나누었다.

2. '닥터 지바고' 사건과
아흐마둘리나의 용기

1958년, 파스테르나크가 『닥터 지바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작가 동맹과 당국은 그를 "조국을 배신한 돼지"라고 비난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퇴학의 위기: 당시 고리키 문학대 학생들에게 파스테르나크를 비난하는 연판장에 서명하라는 압박이 내려졌다. 거의 모든 학생과 교수가 생존을 위해 서명했지만, 아흐마둘리나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다.

•신념의 대가: 이 일로 그녀는 대학에서 정학 처분을 받고 한동안 '불온한 학생'으로 찍히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훗날 이 결정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꼽았다.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을 위해 앞장선 어린 소녀 시인의 용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두 사람의 유대는 더욱 단단해졌다.

3. 페레델키노의 산책: 고독의 공유

두 사람은 종종 페레델키노의 숲길을 산책하며 대화했다. 파스테르나크는 그녀에게 "시인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며,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음악에만 집중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시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에서 느껴지는 그 '꼿꼿한 고독'은 어쩌면 파스테르나크가 처했던 고립된 상황과 그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예술가로서의 존엄을 곁에서 지켜보며 체득한 정서일지도 모른다.

4. 파스테르나크의 죽음과 아흐마둘리나의 애도

1960년 파스테르나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국은 그의 장례식을 축소하려 했으나 수천 명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아흐마둘리나는 그 슬픔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는 이후 여러 편의 시를 통해 그를 추모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언어는 여전히 숲의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녀에게 파스테르나크는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어떤 권력 앞에서도 시의 순수성을 타협하지 않는 '시인의 전형'이었다.

두 시인의 우정이 문학사에 남긴 것

•도덕적 지지: 파스테르나크가 가장 외로웠던 순간에 아흐마둘리나라는 젊은 천재가 보여준 지지는 그가 죽기 전까지 집필을 포기하지 않게 한 원동력이었다.

•서정의 계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배하던 소련 문학계에서 두 사람은 '인간의 영혼'과 '서정적 자아'를 끝까지 지켜낸 방파제 역할을 했다.

벨라 아흐마둘리나가 훗날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서 노년의 파스테르나크가 가졌던 그 맑고도 강인한 눈빛을 발견하곤 했다.


Yevgeny Yevtushenko
아흐마둘리나와 예브투셴코

벨라 아흐마둘리나와 예브게니 예브투셴코(Yevgeny Yevtushenko)의 만남은 1950년대 소련 문학계의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당대 러시아 시의 부흥을 이끌었던 두 주역이었으며, 그들의 결합은 마치 '시와 시의 결혼'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불꽃처럼 뜨거웠던 만큼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며 짧게 막을 내렸다.

1. 세기의 만남:
광장의 사자와 밀실의 요정

1954년, 고리키 문학대학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의 재능과 외모에 매료되었다.

•예브투셴코: 키가 크고 수려한 외모, 거침없는 언변으로 수만 명의 청중을 휘어잡던 '광장의 시인'이었다.

•아흐마둘리나: 신비롭고 이국적인 외모, 떨리는 목소리로 인간 내면의 심연을 노래하던 '은둔의 시인'이었다.

두 사람은 1954년에 결혼하며 소련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들이 모스크바 거리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문학 지망생들에게는 전설적인 장면이 되었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시를 바치며 가장 찬란한 시기를 습니다.

2. 갈등의 불씨:
예술적 기질과 아이라는 현실

그들의 파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아이에 관한 문제였다.

•예브투셴코의 고백: 훗날 예브투셴코는 자서전에서 아흐마둘리나가 임무를 수행하듯 아이를 갖기를 거부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두 사람 모두 시인으로서의 자아가 너무나 강했고, 특히 아흐마둘리나는 자신의 예술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일상의 구속(육아 등)을 두려워했다.

•강요된 선택: 예브투셴코는 그녀에게 낙태를 권유하거나 강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흐마둘리나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남겼다. 그녀는 이 사건 이후 예브투셴코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식어갔다.

3. 이별과 그 후: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

결국 두 사람은 1959년에 이혼하게 된다. 앞서 감상한 시 「나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지 마세요」는 1958년에 쓰였는데, 많은 문학 평론가들은 이 시가 예브투셴코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던 시기의 심경을 담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난 알고 있어요, 이 만남 또다시 / 부질없는 것임을."이 구절은 화려했던 사랑이 결국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허무한 것이 되었음을 깨달은 여인의 절규와도 같다. 이별 후에도 예브투셴코는 평생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위한 시를 썼고, 아흐마둘리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구보다 깊이 슬퍼하며 그녀를 "러시아 시의 다이아몬드"라고 칭송했다.

4. 두 사람의 사랑이 남긴 문학적 흔적

두 사람의 결별은 개인적인 비극이었으나, 러시아 문학사에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예브투셴코는 광장에서 외쳤고, 아흐마둘리나는 밀실에서 속삭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 짧았던 '해빙'의 순간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각자의 길(광장과 밀실)로 흩어지며 완성되었다.


벨라 아흐마둘리나(Бе́лла (Изабе́лла) Аха́товна Ахмаду́лина, 1937년~2010)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시인, 작가, 번역가이다.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불라트 오쿠자바, 그리고 예브게니 옙투셴코와 더불어 러시아 최고의 원로 시인 네 명 가운데 한 명이다. 이들은 모두 1960년대 ‘새로운 물결’을 타고 등장한 시인들이다. 보즈네센스키가 전위파 시인으로, 오쿠자바가 음유 시인으로, 또 통기타 가수로, 그리고 옙투셴코가 저항 시인으로 인기와 명성을 얻고 있을 때, 아흐마둘리나는 배우로, 시나리오 작가로, 그리고 다재다능한, 문자 그대로 탤런트 시인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보즈네센스키의 실험시나 옙투셴코의 참여시와는 대조적으로 아흐마둘리나는 서정성 짙은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시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벨라 아흐마둘리나는 1937년 모스크바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몸속에는 몽골인과 이탈리아계 러시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젊은 날의 모습은 동양 미인을 연상케 한다. 1954년 그녀는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시인 옙투셴코와 결혼했다. 고리키 문예전문대학을 다니던 1959년에는 파스테르나크 비판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으나, 그 후 복학하여 1960년에야 졸업을 한다. 그녀는 작가동맹 회원증을 얻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많은 시의 번역, 특히 그루지야 번역시의 탁월성을 인정받아 겨우 작가동맹 회원이 된 이후부터 그녀는 자기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1962년에 그녀의 첫 시집인 ≪현악기≫(1961)가 발표되었는데, 이 시집은 사랑, 영감의 문제, 과거 등 다양한 테마를 다룬 간결한 서정시로 좋은 평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유명한 단편소설 작가 유리 나기빈과 함께 그의 작품인 <맑은 샘>을 시나리오로 개작하는 일을 하다가 그와 재혼하게 되었다. 1963년에는 그녀의 첫 번째 장시 <비 이야기>의 일부가 문예지 <그루지야>에 발표되었고, 다른 한 편의 장시 <나의 가문>(1964)이 잡지 <청춘>에 발표되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시 창작보다는 시 번역에 더 열중했으며, 이 때문에 두 번째 시집 ≪음악 수업≫(1969)에서는 새로운 창작시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1970년에 들어와 다시 적극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면서 12월에 시인 파벨 안토콜스키와 함께 작가들이 즐겨 찾는 ‘모스크바 우정의 집’에서 저녁 시 낭송회를 열었다. 그 후 계속해서 그녀는 ≪시≫(1975), ≪촛불≫(1977), ≪그루지야의 꿈≫(1977), ≪눈보라≫(1977), ≪비밀≫(1983) 등 많은 시집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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