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지나이다 기삐우스
그 여자
지나이다 기삐우스
파렴치하고 비천하고 야비한
그 여자는 회색의 티끌, 땅의 먼지
그녀와의 뗼 수 없는 친분 덕에
나는 죽어간다.
거칠고 따끔거리고 차가운
그 여자는 한 마리의 배암
그녀의 추악하고 뜨겁고 껄끄러운 비늘에
나는 빈사의 몸이 되었다.
아, 그 여자의 예리한 혓바닥을 만질 수 있다면!
둔중하고 무디고 조용한 그녀
그토록 무겁고 그토록 쇠잔할 수가…
귀머거리 그녀에겐 접근할 수가 없다.
고집스럽게 또아리 틀며
그 여자는 나를 애무하고 내 목을 조인다
이 생명 없이 시꺼멓고
끔찍한 존재는 바로 내 영혼이다!
석영중 옮기고 엮음, 『레퀴엠』혁명기 러시아 여성시인 선집(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中
시대 배경과 시평
지나이다 기삐우스(Zinaida Gippius)의 시 〈그 여자〉는 읽는 순간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강렬한 자기 고백적 작품이다.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모로 불리는 그녀가 던지는 이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작품의 심층적인 의미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정리한다.
시대적 배경: '세기말(Fin de Siècle)'의
혼돈과 러시아 상징주의
이 시가 쓰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러시아는 거대한 폭풍 전야와 같았다.
•몰락하는 제국과 불안감: 로마노프 왕조의 권위가 흔들리고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 지식인들은 극도의 허무주의와 불안을 느꼈다.
•러시아 상징주의의 탄생: 기삐우스는 현실의 가시적인 세계 너머에 있는 '영적 본질'을 탐구하려 했다. 그녀는 퇴폐주의(Decadence)적 경향을 띠며 인간 내면의 어두움, 죄악, 그리고 신비주의에 몰두했다.
•성(性)과 영혼의 이분법: 기삐우스는 남성복을 즐겨 입고 '안톤 크라이니'라는 남성 필명으로 평론을 쓰는 등, 고정된 성 역할을 거부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그녀의 중성적이고 복합적인 정체성은 시 속에서 '자아'를 타자화하는 독특한 시각을 형성했다.
[시평] 나를 파괴하는 '내 안의 괴물'
이 시의 가장 충격적인 반전은 마지막 행에 있다. 시종일관 화자를 괴롭히던 추악하고 비천한 '그 여자'가 사실은 화자 자신의 '영혼'임을 밝히는 순간이다.
1. 혐오의 대상이 된 자아
기삐우스는 자신의 영혼을 '배암(뱀)', '먼지', '비늘'과 같은 징그러운 이미지로 묘사한다. 이는 인간이 지닌 원죄나 저열한 본능, 혹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내면의 추악함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녀는 영혼을 고결한 것이 아닌, 나를 질식시키는 끔찍한 짐으로 정의한다.
2. 소통 불가능한 단절 (귀머거리 그녀)
화자는 자신의 영혼을 향해 '예리한 혓바닥을 만질 수 있다면'이라고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귀머거리'라 접근할 수 없다고 탄식한다. 이는 자아 성찰의 고통을 의미한다. 내 안의 문제를 직시하고 싶지만, 정작 내 영혼은 무겁고 둔중하게 가라앉아 소통을 거부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3. 애무와 교살의 이중성
"그 여자는 나를 애무하고 내 목을 조인다"는 표현은 이 시의 압권이다. 자아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지만, 동시에 나를 파괴하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이 지독한 자기혐오와 집착의 이중주는 인간 내면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독자를 위한 감상 포인트
이 시는 단순히 "나는 내 영혼이 싫다"라는 한탄이 아니다. 기삐우스는 가장 비천한 밑바닥(먼지, 뱀)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참된 구원'과 '영적 고양'을 갈구하고 있다.
"당신은 자신의 내면을 한 번이라도 타인처럼 낯설게, 혹은 끔찍하게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직면할 준비가 된 독자라면, 기삐우스의 이 시가 단순한 공포를 넘어선 지독한 자기 성찰의 기록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데카당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문학은 제국의 몰락과 혁명의 전조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데카당스(Decadence, 퇴폐주의)'라는 독특한 꽃을 피웠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이 붕괴된 자리에서 피어난 극도의 탐미주의와 허무주의의 결합이었다. 당시 러시아 퇴폐주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 4가지를 정리한다.
1. 시대적 불안: '황혼의 미학’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제국의 끝자락, 즉 '밤이 오기 직전의 황혼'에 살고 있다고 느꼈다.
•종말론적 분위기: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내일은 없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현실 도피: 고통스러운 현실 대신 꿈, 환상, 신비주의, 그리고 탐미적인 내면세계로 숨어들었다.
2. 금기된 것에 대한 탐닉
퇴폐주의 작가들은 대중이 기피하는 소재에서 미적 가치를 찾아냈다.
•죽음과 병적인 것: 지나이다 기삐우스의 시에서 영혼을 '뱀'이나 '먼지'로 묘사했듯, 추하고 파괴적인 것에서 기묘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했다.
•관능주의와 성(性): 육체적 쾌락과 고통의 경계를 허물며, 당시 보수적이었던 기독교적 윤리관에 도전했다.
3. '범신론적' 상징주의로의 연결
러시아의 퇴폐주의는 서구(프랑스 등)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영성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띠었다.
그들은 현실 세계를 단지 '더 높은 차원의 세계'를 비추는 불완전한 거울(상징)로 보았다. 디미트리 메레즈코프스키나 지나이다 기삐우스 같은 인물들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종교적 이상을 꿈꾸기도 했다.
4. 주요 작가와 화풍
러시아 퇴폐주의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활동했다.
(구분:주요 인물-특징)
•문학: 표도르 솔로구프-소설 《소악마》를 통해 인간 내면의 저열함과 악마성을 극도로 묘사함.
•문학: 발레리 브류소프-러시아 상징주의의 기틀을 마련하며 도시적 우울과 역사적 환상을 노래함.
•미술: 미하일 브루벨'-악마' 시리즈를 통해 고독하고 우울한 퇴폐적 영웅상을 시각화함.
시각적 이해:
미하일 브루벨의〈앉아 있는 악마〉
당시 러시아 퇴폐주의의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미하일 브루벨(Mikhail Vrubel)의 그림이다. 그는 기삐우스와 동시대를 살며 그 세대의 우울과 고독을 화폭에 담았다.
위 그림 속 악마는 우리가 흔히 아는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강인한 육체를 가졌으나 영혼은 한없이 고독하고 지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기삐우스의 시 〈그 여자〉에서 영혼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감상의 팁
러시아 퇴폐주의 문학을 읽을 때는 "왜 이들은 이토록 어둠에 집착했을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파멸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짓된 밝음(부패한 현실)보다 정직한 어둠(내면의 진실)을 택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이 생명 없이 시꺼멓고
끔찍한 존재는 바로 내 영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