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하는 여인

by 지나이다 기삐우스

by 김양훈

바느질하는 여인

지나이다 기삐우스


이미 사흘째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다…

욕망과 악에 젖은 생각들

등허리의 통증―어디에 눈을 주어야 할까-

사방에는 푸른 얼룩들.

사원의 종이 슬피 울다 그쳐 버렸다

나는 여전히 혼자,

솜씨 없는 바늘 밑에선

폭염 같은 선홍색 비단이 사각사각 구겨지는데.


모든 현상에는 봉인이 붙어 있는 법

서로서로 얽혀 버린 듯

한 가지를 알면 거기 숨겨진 또 다른 것이

자꾸만 알고 싶어져.


이 비단은 나에게―한 개의 불꽃

불꽃은 이미―한 방울의 피

피는 우리가 초라한 언어로

부르는 그것의 상징―사랑.


사랑은―단지 한 개의 소리…

그러나 밤이 깊어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

아니, 불꽃도 아니고 핏방울도 아니고…

그저 공단 한 폭이 수줍은 바늘 아래서 사각거린다.


석영중 옮기고 엮음, 『레퀴엠』혁명기 러시아 여성시인 선집(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中


지나이다 기삐우스의 시 <바느질하는 여인>을 중심으로, 19세기 말 러시아 상징주의의 미학과 형이상학적 허무주의를 분석한 문학 평론이다.
[평론] 은유의 직조와 허무의 바늘 끝:
지나이다 기삐우스의 ‘바느질하는 여인’론

1. 서론:

‘은의 시대’의 여왕, 기삐우스와 상징주의

19세기 말 러시아 문학사는 이른바 ‘은의 시대(Silver Age)’라 불리는 거대한 전환기를 맞이한다. 푸시킨과 톨스토이가 구축한 리얼리즘의 토양 위에, 보들레르와 베를렌느로부터 수입된 상징주의와 데카당스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이 시기 지나이다 기삐우스(Zinaida Gippius)는 단순한 여성 시인을 넘어, 러시아 상징주의의 이론적 지표이자 ‘데카당스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그녀의 시 <바느질하는 여인>은 상징주의적 미학이 어떻게 일상적인 사물과 행위를 투과하여 형이상학적 심연에 도달하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하는 허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2. 고립의 공간과 침묵의 언어

시의 도입부는 철저한 단절을 선언한다. “이미 사흘째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단순한 물리적 고독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내면의 ‘심연’으로 침잠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나타낸다.

상징주의자들에게 언어는 타인과 정보를 교환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물의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깨우는 마법의 주문이어야 했다. 기삐우스에게 3일간의 침묵은 바느질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과 악에 젖은 생각들”을 길어 올리기 위한 정화의 시간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등허리의 통증”은 지적인 고뇌가 육체적 고통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시적 화자를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감각 속에 붙들어 맨다.

3. 색채의 상징학: 선홍색 비단에서 사랑으로

이 시의 핵심적 전개는 ‘선홍색 비단’이라는 사물로부터 시작되는 연쇄적인 은유의 확장이다.


“이 비단은 나에게―한 개의 불꽃

불꽃은 이미―한 방울의 피

피는 우리가 초라한 언어로

부르는 그것의 상징―사랑.”


기삐우스는 시각적 이미지(비단)를 에너지의 형태(불꽃)로 바꾸고, 다시 생명의 본질(피)로 치환한 뒤, 최종적으로 추상적 관념인 ‘사랑’에 도달한다. 이것은 상징주의의 핵심 원리인 ‘조응(Correspondences)’의 충실한 구현이다. 사물과 관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존재하며, 시인은 그 끈을 잡아당겨 우주의 비밀을 드러내는 존재다.

특히 ‘선홍색’은 기삐우스의 시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열정인 동시에 고통이며, 생명인 동시에 죽음의 전조다. 화자가 “폭염 같은 선홍색 비단”을 “솜씨 없는 바늘”로 찌르는 행위는, 자신의 생명력 혹은 욕망을 날카로운 지성(바늘)으로 분석하고 해체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4. ‘봉인’과 지적 갈망: 미지의 것에 대한 매혹

화자는 “모든 현상에는 봉인이 붙어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이는 세상의 가시적인 모습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며, 그 뒤에 진정한 실재가 숨겨져 있다는 플라톤적 세계관 혹은 신비주의적 태도를 반영한다.

“한 가지를 알면 거기 숨겨진 또 다른 것이/자꾸만 알고 싶어져”라는 구절은 기삐우스가 평생을 바쳐 추구했던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갈망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하나의 봉인을 뜯으면 또 다른 봉인이 나타날 뿐이다. 지식과 인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우주의 거대한 비밀 앞에서 더욱 무력해지며, 이러한 갈망은 결국 ‘불가능한 소통’에 대한 슬픔으로 이어진다.

5. 허무로의 귀환: “단지 한 개의 소리”

시의 후반부에서 기삐우스는 돌연 자신이 쌓아 올린 은유의 탑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사랑을 “단지 한 개의 소리”라고 명명하는 순간, 형이상학적 고양감은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아니, 불꽃도 아니고 핏방울도 아니고…

그저 공단 한 폭이 수줍은 바늘 아래서 사각거린다.”


이 결말은 기삐우스 시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녀는 관념의 유희에 매몰되지 않는다. 밤이 깊어지자(한계에 부딪히자), 그녀는 모든 거창한 수식어를 걷어내고 다시 사물의 ‘즉물성’으로 돌아온다. 비단은 그저 비단일 뿐이고, 바느질은 그저 바느질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세기말 러시아 지식인들이 느꼈던 근원적인 허무주의를 대변한다. 아무리 고결한 상징을 부여해도 현실의 비단은 여전히 “사각사각 구겨지는” 차가운 물질에 불과하다는 자각이다. 하지만 이 허무는 절망이라기보다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냉철한 지성의 승리에 가깝다.

6. 결론: 바늘 끝에 맺힌 현대인의 초상

지나이다 기삐우스의 <바느질하는 여인>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서 관념으로, 다시 관념에서 물질로 회귀하는 치열한 인식의 투쟁기다.

그녀는 바느질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정적인 여성의 노동을 ‘세계의 봉인을 해제하려는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격상시켰다. 동시에 그 모든 사유의 끝에서 “사랑”조차 “초라한 언어”에 불과함을 인정하는 솔직함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이 시가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줄까. 우리 역시 각자의 ‘선홍색 비단’(욕망 혹은 꿈)을 들고, 그것이 불꽃인지 핏방울인지 고민하며, 결국은 침묵 속에서 홀로 바느질을 이어가는 고독한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삐우스의 바늘 끝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의식을 예리하게 찌르고 있다.


Zinaida Nikolayevna Gippius
상징주의 기법
지나이다 기삐우스의 <바느질하는 여인>은 러시아 은세기(Silver Age) 상징주의가 지향했던 미학적 도구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에 나타난 주요 상징주의 기법 4가지를 분석한다.

1. 조응(Correspondences)과 유추의 연쇄

상징주의자들은 세상의 가시적인 사물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나 추상적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를 '조응'이라고 한다.

■기법의 적용: 시 속에서 '비단→불꽃→피→사랑'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전형적인 조응의 예다.

■효과: 단순한 천 조각(물질)이 화자의 사유를 거쳐 형이상학적 가치(사랑)로 변모한다. 시인은 사물 사이의 숨겨진 연결 고리를 찾아내어 독자에게 '직관적 도약'을 경험하게 한다.

2. 이원론적 세계관과 '봉인'의 상징

러시아 상징주의는 현실 세계를 '껍데기'로, 그 이면의 세계를 '참된 실재'로 보는 이원론에 기초한다.

■기법의 적용: "모든 현상에는 봉인이 붙어 있는 법"이라는 구절은 가시적인 현상이 진실을 가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효과: 화자가 바느질을 하며 "숨겨진 또 다른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현상의 봉인을 뜯고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상징주의적 탐구 정신을 보여준다.

3. 데카당스(Decadence)와 병적인 예민함

19세기 말의 불안과 허무를 예술로 승화시킨 데카당스적 정조는 상징주의의 중요한 정서적 배경이다.

■기법의 적용: "욕망과 악에 젖은 생각들", "등허리의 통증", "슬피 울다 그쳐 버린 종소리" 등은 시각과 청각을 넘어선 신경증적인 예민함을 드러낸다.

■효과: 건강하고 밝은 서정성보다는 침울하고 고립된 내면을 강조함으로써, 시대의 종말론적 분위기와 개인의 실존적 고독을 극대화한다.

4. 음악성과 청각적 심상 (Onomatopoeia)

상징주의는 "언어는 의미 전달보다 음악적 울림에 가까워야 한다"고 주장했다(베를렌느의 '무엇보다 음악을' 원칙).

■기법의 적용: 비단이 구겨지거나 바늘이 지나갈 때 나는 "사각사각"이라는 의성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효과: 이 소리는 시 전체의 정적을 깨뜨리는 유일한 청각적 요소다. '사각거림'은 비단이 내는 소리인 동시에, 화자의 날카로운 신경이 곤두서는 소리이며, 허무한 현실이 바스러지는 소리로 기능한다.


[참고] 러시아 상징주의의 구조적 흐름

-특징과 <바느질하는 여인>에서의 발현

■신비주의: 현상 너머의 '봉인'을 인지함

■미적 고립: 사흘간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 화자의 태도

■색채상징: 선홍색(열정/고통)과 푸른 얼룩(우울/신비)의 대비

■반복과 회귀: 관념적 유희 끝에 다시 '공단 한 폭'으로 돌아오는 구조

기삐우스는 이처럼 정교한 상징주의 기법을 통해 '바느질'이라는 아주 사적인 행위를 우주적인 고독의 의식으로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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