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죽어갈 때는

by 벨리미르 흘레브니꼬프

by 김양훈

말이 죽어갈 때는

벨리미르 흘레브니꼬프


말이 죽어갈 때는 ㅡ 헐떡이고

풀이 죽어갈 때는 ㅡ 말라가고

태양이 죽어갈 때는 ㅡ 꺼져가고

사람이 죽어갈 때는 ㅡ 노래한다.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시평과 미래주의
그리고 시간의 왕
벨리미르 흘레브니꼬프(Velimir Khlebnikov)의 이 짧은 시는 4행이라는 극도로 절제된 형식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예술의 숭고함'을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1. 작품 분석 및 시평: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노래'

이 시는 '말(동물)', '풀(식물)', '태양(무생물/자연물)'이라는 존재들과 '사람'을 대조시키며 전개됩니다.

◇대조의 구조: 다른 모든 존재의 죽음은 생물학적, 물리적인 '소멸의 과정'입니다. 말은 숨이 차오르고, 풀은 수분이 빠져나가며, 태양은 빛을 잃습니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엔트로피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이자 자연의 섭리입니다.

◇반전의 4행: 그러나 마지막 행에서 인간은 죽어갈 때 '노래'합니다. 여기서 '노래'는 단순한 발성이나 즐거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인간이 발휘하는 '정신적 승리'이자, 육체는 소멸할지언정 의미는 남기겠다는 '예술적 저항'입니다.

◇시적 의미: 인간은 자기 죽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언어'와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찬가입니다. 비극적 상황을 미적으로 극복하는 인간만의 존엄성을 보여줍니다.

2. 작품의 배경:
러시아 미래주의 (Futurism)

이 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흘레브니꼬프가 주도했던 '러시아 미래주의'를 알아야 합니다.

◇전통과의 단절: 미래주의자들은 과거의 낡은 문학 관습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했습니다.

◇자움(Zaum): 흘레브니꼬프는 '초이성 언어'라는 뜻의 '자움'을 창안했습니다. 그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소리 그 자체의 마술적 힘을 믿었습니다. 이 시에서도 '헐떡이고', '말라가고', '꺼져가고'라는 의태적 표현들이 리듬을 형성하며 마지막 '노래한다'라는 결론으로 독자를 몰아갑니다.

◇원시주의와 미래의 결합: 그는 기계적인 문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원시적인 뿌리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노래하는 인간의 모습은 현대적인 동시에, 고대 샤먼(Shaman)이 죽음을 맞이하는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이미지를 환기시킵니다.

3. 흘레브니꼬프와 '시간의 왕'

흘레브니꼬프는 스스로를 '시간의 왕'이라 칭하며, 역사의 반복되는 법칙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려 했던 기이한 천재였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의 일부였고, 시인은 그 질서를 노래로 기록하는 존재였습니다. 이 시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를 가장 간결하게 압축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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