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소, 전기공부씨

다행이다, 마흔에 전기공부 시작할 수 있어서

by 듀란

반갑소, 전기공부씨

전기 공부를 마음먹었다. 책상에 앉아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교재를 꺼낸다.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졸린 것 같다. 전기산업기사 시험은 5과목이다. 각 과목마다 교재의 두께가 어마무시했다. 한 권을 집어 쭉 살펴본다. 버스도 안 탔는데 멀미가 나는 듯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하고 시작 후, 10분도 안되어 책을 덮어 버린다.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유튜브를 본다. 의미도 없는 영상들을 그저 바라본다. 이게 진짜 맞는 것일까, 꼭 이 방법이어야만 하는가. 그래 이 방법이 맞아. 많은 생각을 끝나고 이 자리에 앉은 것이니. 오를 수 없는데 올라야만 하는 높은 산 앞에 있는 것처럼 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흔. 늦었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나이에 난 그렇게 공부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서먹서먹

그렇게 며칠을 시작도 못하고 유튜브만 봤다. 이러려고 돈 내고 스터디카페 온게 아닌데 말이다. 유튜브를 끄고 교재를 꺼내 다시 막막함을 마주한다. 내용이 너무 어렵다. 차라리 처음부터 학원으로 갈까? 아니면 스터디그룹을 찾아볼까?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 걸까?

잘 생각해 보니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지 따지기 전에 지금의 이 공간 자체가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 을 알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도 아이스브레이킹이 필요한데 여간 어려우신 전기공부씨가 아닌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없는 법이다. 이 공간, 이 책상, 이 불편한 의자에 익숙해 지기로 했다. 공부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그렇다. 그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고등학교 때 수능을 준비하며 그 공간에 오랜 시간 머물렀었다. 그 시절의 나, 어떻게 공부했던 걸까? 내 엉덩이 근육 어딘가 기억되어 있는 공부 근육의 기억을 더듬더듬 끄집어내어 본다. 기억이 날듯 말듯하다.


한자를 쓰다

난 만년필을 좋아한다. 만년필 자체도 좋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쓰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글씨를 제대로 쓰는 것은 아니었다. 만년필로 글씨를 쓰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펜촉이 종이와 닿아서 쓱싹거리는 그 질감이 특히 그렇다. 그 느낌을 이 공간에 채워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아이스브레이킹 좀 하다가 슬그머니 본론인 전기공부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일단은 일기 같은 것부터 쓰기 시작했다. 좀 재미가 없었다. 한자를 써 보았다. 한자는 고등학교 때 공부를 좀 했었기에 몇 번 써보니 어렵진 않았다. 아내가 사다준 만년필로 한자를 몇 글자 어색하게 써 내려가본다. 역시! 그 기분 좋은 느낌이 공부의 공간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렇게 난 매일 책상에 앉아서 한문을 썼다. 어마무시한 전기공부씨는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말이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지나고 나니 엉뚱하게 한자실력이 많이 늘어있었다. 간단히 아이스브레이킹으로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져버렸다. 한자 쓰기는 공부하는 그곳의 느낌을 상당히 편안하고 익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한자만 쓴 것은 아니다. 한자를 쓰면서 내가 왜 이 놈에 전기를 공부해야 하는지 스스로 동기부여를 했다. 이토록 지독하게 재미없고 어지러운 공부를 왜 시작해야 하는지, 왜 이루어야만 하는지 끝없이 묻고 답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전기공부를 시작해 버렸다.




늦은 나이에 전기를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아니 전기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공부를 마음먹었다면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그냥 책상이 아니다. 삶의 무게 앞에 앉은 것이다. 피곤하고 졸음이 쏟아질 것이다. 눈도, 허리도, 몸도 예전같지 않다. 아니 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책상에 앉았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참 잘한 것이다. 이제라도 앉은 것이 어딘가! 공부씨는 어려운 분이다. 우선은 아이스브레이킹이 필요하다. 즐겁게,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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