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동백꽃 질 때

눈을 뜨니 아흔 살이 되었다.

 샛노란 개나리가 놀이터 화단을 병풍처럼 둘렀다.

한발 한발 떼어 딛는 작은 발과 뒤뚱거리는 엉덩이를 쫓아다니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땅에서 주워 입에 넣을세라, 엎어질세라. 온전한 정성으로 하루를 보내버렸다. 내일도 오늘처럼 보낼 것을 생각하면 막막했다.     

 창백한 벚꽃들이 오솔길 하늘을 이불처럼 덮었다.

아이들과 달콤하게 팝콘 나무를 우러러보았다. 몇 밤 자고 나면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다 이내 흙으로 돌아갈 꽃잎을 보며, 아이들이 장성하면 나는 또 무엇으로 살아갈지 걱정되었다.     


개나리, 벚꽃도 다 보내고 이제 장미가 내 친구다.

장미 꽃봉오리는 울타리에 기대었다 어느새 검붉게 피어난다.

나의 세 아들과 시어머니의 아들까지, 지긋지긋한 역병 때문에 육아 해방의 날은 기약이 없다. 늦둥이 셋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여유로운 생활을 기대했는데, 엄마 역할도 버거운 내가 선생님과 급식 조리사까지 겸하고 있다. 돌아서면 밥하고 밥하면 설거지가 산더미이다. 궁둥이를 잠시 바닥에 붙이려면 이것저것 찾아 달라 부르니 종살이가 따로 없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먼저 보겠다고 아옹다옹 싸운다. 남편은 10년이 넘도록 애 하나 돌보지 못하냐 소리친다. 나는 그 핀잔을 애들 앞에서 듣는다.


오늘은 매정한 엄마가 되어본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신세한탄을 퍼붓는다.

가방에 물 한 병과 거울 하나를 챙겨 넣는다.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선다.

막내가 다리를 감싸고 운다.

첫째, 둘째, 셋째의 삼단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대문을 박차고 나온다.      


하늘의 따가운 눈총이 뒤통수에 내리꽂힌다.

발코니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엄마를 동동거리며 부르고 몸을 기울여 통곡하는 아이들을 올려다보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을 날카롭게 세운다.

별의별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와 안개 낀 눈과 흐릿한 마음, 나는 어지럽다.     


태양은 따갑게 비추어 모든 것이 선명하다.

‘죽자 살자 따라다닌 남편과 내 속으로 낳은 아이들, 모두 내가 자처한 일이다. 집안에서 쳇바퀴 돌 듯 사는 것이 뭐 그렇게 한스럽고 억울할 일인가? 이제 세 살, 아홉 살, 열 살 된 아이가 무슨 세근이 들까?’ 남편은 밖에서 돈 번다고 힘들고 나는 안에서 엄마의 몫을 한다고 힘들 뿐인데…….   

   

검붉은 장미가 바람결에 나를 부른다.     

“장미가 아름다운 이유는
 지금이 5월이기 때문이야.
우리는 이내 지지만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야.
네 삶의 가치를 잊지 마”     


뚜벅뚜벅 걷다가 터벅터벅 걷는다.

욕망산 둘레돌 때까지도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지 못했다.      

가족과 함께 오르던 때와 달리 산은 참 고요하다.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이 내려와 나를 지나치는데 심장이 두근거린다. 서둘러 꼭대기 너른 곳을 향해 발을 젓는다.      

마을과 바다. 그리고 하늘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도착한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물을 마신다.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언제까지 참고 살아야 하나?’

‘아이들은 잘 있겠지.’     

잠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마음이 개운하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숨 쉬니 참 무료하네. 어차피 죽으면 썩을 몸뚱어리, 좀 닳고 희생하는 게 어때서!’     

문득 아까 마주친 꼬부랑 할머니가 떠오른다.

‘왜 올라오셨을까?'


다시 한 모금의 물을 마시고 물병을 가방에 넣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파도가 밑줄 그은 갯벌 같은 얼굴에 하얀 구름 한 점을 머리에 덮어쓰고 있다.

입을 벌렸다가 오므리고 눈썹을 씰룩거려 봐도 생기 없긴 마찬가지다.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끔벅여도 다 늙은 할머니다.      

‘내 인생의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는 피우지도 못했는데.......’     

듬직한 초록 잎사귀에 보듬긴 동백꽃이 나를 내려 보고 수군거린다.      

피고 지는 인생이야. 유난 떨지 마.

너를 둘러싸고 있는 생명에 감사해.

최선을 다해 돌보길 바라.

그들 세상의 전부인 널 귀하게 생각해.”     


아이들이 보고 싶어 서둘러 집을 향한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들고 있던 가방을 탈탈 털어 뒤집어썼다. 그대로 주저앉아 숨어버렸다.

저 멀리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엄마”

늙어버린 아들이 우니 내 마음도 아프다.

가방을 빼고 나를 꼭 안아준다.

“말도 안 하고 나가면 어떻게 해. 못 만나면 어쩌려고. 신발 신어요, 엄마. 집에 가자.”

집 나간 꼬부랑 어미를 따듯하게 감싼다.  

   

아이들 키울 때가 가장 좋을 때였구나,

주어진 인생을 가볍게 흘리지 말 것을.      

나도 꽃처럼 살 것을.

높다랗고 우아한 목련처럼.      

추한 꼴은 보이지 않는 똑똑한 동백처럼.


작가의 이전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아 불지 마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