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마 Nov 10. 2023

풍요로운 해안


  큰 나무 밑 우체국 밖에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동네였다. 카페 안은 막 베어낸 나무의 속살 냄새가 났다. 카운터에 놓여있는 태블릿의 홈버튼을 꾹 눌렀더니 열 개 남짓 원두의 이름만 나란히 적힌 파란색 사진이 튀어 올랐다.


  커피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러 단어와 알파벳 조합으로 이루어진 그 긴 이름 속에 커피의 등급이나 생산 농장의 정보 따위가 들어있다는 걸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원두의 향과 맛도 그렇고. 커피를 모르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둔다면 가장 안쪽, 정 가운데 위치할 나는 퍽 난감해서 화면만 뚫어져라 봤다. 갑자기 외국에 온 것 같았다. 분명 우리말로 적혀있지만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글자들.


  뭐 식당이나 마찬가지지, 무난한 것부터 적혀있지 않을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내려갈수록 도전적이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원두가 나오는 건 아닐까? 예를 들어 맨 마지막 11000원짜리 원두는 남미 어느 산비탈에 있는 커피 농장에서 인분으로 비료를 주고 물과 오줌과 햇빛을 적당히 잘 공급 한 뒤 산기슭을 타고 올라온 해풍을 맞으며 잘 익은 커피 열매를 먹은 나무늘보가 싼 똥을 뒤져서 찾은 알맹이를 흐르는 흙탕물에 씻어 말리고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하루종일 손이 부르트게 볶은 커피콩. 세상에 그런 건 없다. 내가 방금 지어냈으니까. 그래 그것보단 덜하겠지.


  오늘은 첫 방문이니 첫 번째 원두를 고를까? 다음 날엔 두 번째, 그다음 날에는 세 번째 원두를 고르면 너무 도장 깨기 같은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에 머쓱하게 "원두 종류가 많네요.." 하고 말했지만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라는 듯 침묵이 흘렀다. 잠깐 얼굴을 올려다봤더니 과연 어떤 걸 고를까 두고 보겠다는 표정처럼 보였다. 젊은 카페 주인이 나를 마주하고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어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체감상 이미 3분 정도는 지난 것 같았다. 코스타리카는 어디지? 뭐 어쨌거나 중남미 아니겠는가 하고 가장 긴 이름의 원두를 짚었더니 주인은 꽤 잘 골랐다는 흡족한 표정으로 탄닌감이 좋고 레드와인의 풍미가 느껴지는 좋은 원두라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역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뒤를 돌아 작은 목소리로 안 들리게 탄닌, 탄닌 중얼거리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젊은 커피의 권위자가 먼저 필터도 적시고 당장 갈아낸 원두에 뜨거운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한참 동안 공들여 내린 커피였다. 커피를 내어주며 곁들인 설명으로 산미가 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주에서 마셨던 이름 모를 핸드드립 커피가 산미는 훨씬 강했던 기억이 났다. 코스타리카_메카_SHB_레드허니. 내가 방금 고른 원두의 이름이었다. 이름이 길어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2023.02.10. 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