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와 달리기
내가 '달리기'를 떠올리면 단숨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그러나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유의미한 교류는 거의 없다. 머릿속 깊숙한 곳에 쌓여있었던 그 사람에 대한 먼지 같은 기억들을 한 톨씩 쓸어 모아야 지금 여기다 겨우겨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들렀던 서점에 당당히 진열되어 있었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루키의 많은 책들 중에 왜 하필 신간과 이 책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던 걸까?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본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던 건 B다.
내 기억에 의하면 우리가 달리기에 대해서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달리기를 오랫동안 (몰래) 지켜봐 왔다. 그러니까 시간은 작년 2월 둘째 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에 나는 제주 동쪽의 작은 동네에서 지내고 있었다. 제주의 2월 한낮에는 두 뺨을 얼리는 쌀쌀한 바람이 부는 동시에, 꽤나 뜨끈한 햇살이 온몸을 데우기 때문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그 시기의 육지의 것과 비교하면 생각보다 훨씬 더 가볍다. 제주의 날씨 덕분에 B가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B는 퇴근 후 요가를 다닌다고 했다. 하지만 요가만으로 단련된 몸은 아니었다는 것도 곧 알게 된 게, 아침에 빨래를 하고 앞마당에 이불을 널고 있었는데 얇은 오트밀 색 반팔 티셔츠(등에는 작은 구멍도 나 있었다)와 나이키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검정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숨을 고르며 턱턱 걸어 들어오는 B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의 90프로가 노인들인 그 동네에는 번쩍거리는 요란한 헬스장이 없기는 물론이거니와 동네 외곽 큰 도로가에 하나 있는 요가원에 이 아침부터 굳이 갔을 리도 없으니, 동네 중심을 가로지르는 올레길을 따라 동네 끝에 자리 잡은 해수욕장 일대를 지나며 마을을 크게 한 바퀴 정도 뛰었을 게 분명했다. 그 코스는 내가 제주에 처음 왔을 때 누군가에게 했던 ‘산책은 어디로 다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알게 되었던 길이고, 또 누군가의 첨언에 의하면 동네는 한 바퀴에 3킬로 정도였다. 나는 3킬로는 고사하고 100미터만 뛰어도 얼굴이 푹 익어서 곧 터질 것 같은 시뻘건 토마토 색깔이 되어버리는데 내 앞에 있는 B의 얼굴은 뽀얬다. 자갈이 깔린 마당을 터덜터덜 차며 걸어오는 발걸음 외에는 뛰었다는 티가 나지 않아 그가 달리기를 종종 하는가 보다 했다. 그게 B의 달리기에 관한 나의 첫인상이다.
그 후에 나와 B는 각자 육지로 돌아가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살았을 것이다. 말했듯이 우리는 내가 육지로 돌아가기 전 인스타그램을 맞팔했었던 것(지금은 맞팔도 아니다) 말고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자연히 본가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무래도 4년 동안 혼자 살다가 집으로 들어오니 그동안 마주하지 않았던 가정의 문제들을 바로 맞닥뜨려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서서히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게 당연했다. 마음이 생기를 잃으며 점점 가라앉았고 그 또한 당연했다. 그래서 올해 1월부터 달리기를 했었다. 차갑게 눌어붙은 마음을 다시 뛰게 하는 건 정말 말 그대로 냅다 뛰는 것이었다. 그래봐야 내가 바짝 뛰었던 건 그 후로 삼월까지 두 달 정도였으니, 내가 느낀 정신적인 피로감은 기껏해야 달리기 2달 치로 해결되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 뒤론 다시 달리지 않았다.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B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속 몇 구절과 나이키 런 클럽 기록이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좀 지나고 이번 여름부터였던 것 같다. 그 무렵 B는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매일 올라올 때도 있고 이틀 걸러 올라올 때도 있는 그의 달리기 기록은 그 횟수로 본다면 '성실한 달리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꾸준해 보였다. 630. 730. 530. 그런 식으로 망원 한강변을 따라 6-8킬로, 많게는 10킬로 20킬로까지 거의 매일 뛰어댔다. B의 달리기는 주로 야외에서 이루어졌고 런클럽 기록 속 뒷 배경사진으로 보아하니 B는 어디라 할 것 없이 달렸다. 우리나라에서, 심지어 해외의 어디선가에서까지. 장소를 바꿔가며 꾸준히 달리고 있는 B의 모습을 떠올리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저녁 어느 순간만 되면 튀어나가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는 스토리에 올라오는 런클럽 기록 속의 작은 미니맵을 캡처해 봤다. (아 여기까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름모 모양의 그 선을 크게 키워서 지도에 가져다 대보니 희한하게 B가 산다고 말했던 동네의 어느 길과 딱 들어맞아 결국 B가 어떤 루트로 달리는지까지도 알게 되었다. 마침 그즈음 서울에 갔는데 그 동네에 볼 일이 있었다. 할 일을 다 끝내고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시간 정도가 남아 B가 달렸던 길을 따라 한 번 걸어 보았다.
대체로 직선 주로 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횡단보도가 있고, 보도가 울룩불룩한 곳도 많았다. 여길 그렇게 달렸을까? 양 옆으로 높이 뻗어 줄기가 알록달록한 플라타너스 나무에서는 이국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나무를 구경하며 좀 더 걸으니 한강이 나왔다. B의 러닝 종반부에 마주하게 되는 밤의 한강변이 말할 것도 없이 예뻤을 거라는 것은 지금이 굳이 저녁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나는 B가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를 앞서 달려가는 모습과 내 옆에서 뛰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기만 했다. 그 후에도 매일 밤 올라오는 달리기 기록을 더 보고 싶었는데 무슨 이유에선가 그러지 못하게 됐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쌀쌀한 초가을에 입성했고 서점에서 우연히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주하고 나서야 문득 B의 달리기가 다시 생각이 났다.
아마도 B는 여전히 뛰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B는 본인의 흥미를 끄는 일이 생기면 그 속으로 꽤나 푹 빠져버리는 사람 같았다. 이번 가을 동아 마라톤과 jtbc 마라톤이 목표였을 것이다. 두 대회는 아주 크고 유구한 전통의 국내 마라톤 대회여서 많은 수의 러너들이 모여 달린다. 다들 전국 각지 어디서 그렇게 열심히 달리고 연습해 왔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다. 적어도 내 주위에 취미나 건강을 목적으로 꾸준히 달리는 사람은 없다. 저녁 퇴근길에 큰 공원을 지나치지만, 주로 저녁밥을 배부르게 먹고 더부룩한 속을 잠재우려 나온 것 같은 사람. 낮 동안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내려 어딘가 골몰한 표정으로 걷는 사람. 어디 마땅히 갈 곳 없이 손잡고 밤을 헤매는 고등학생 커플들. 병원에서 의사가 이젠 더 이상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걷는 것 같은 사람들뿐이지 본격적으로 뛰는 사람은 찾기 드물다. 달리기가 B의 흥미를 끌었듯이, B의 달리기는 나의 흥미를 끌었다.
혹시나 하고 유튜브에 들어가 찾아보니 두 대회는 역시 모두 끝났고 어느 고마운 유튜버 몇 명이 사람들이 달려가는 길목에 카메라를 거치해 두고 한 시간 정도 촬영한 경기 영상이 적은 조회 수로 저 밑에 올라와 있었다.
이 많은 인간들 속에서 B를 찾을 수 있을까? 경기에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도 모르고, 뛰고 있다 한들 뭘 입고 뛰는지도 모르는데. 미쳤다. •••.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이패드로 영상을 틀고 있었다. 차마 손바닥만 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첫 번째 영상은 동아마라톤 영상이었는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발견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지쳐 보이지 않고 페이스도 무척 빨랐다. 영상이 찍히고 있는 곳은 5.5킬로 지점, 한국은행 사거리 앞이었다.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워치로 페이스를 체크하고 손으로 얼굴에 땀을 훑으며 카메라 앞을 뛰어가는 모습이 2-3초 정도 찍혀 있었다. 그 모습만 멍하니 몇 번을 돌려봤다. 그러길 반복하다 그만두고 좀 더 찾아보니 jtbc 마라톤 영상이 있었다. 사실 이게 제일 궁금했다. 업로드된 영상들을 다 눌러보고 콩알•깨알만큼 나온 모습, 멀리서 지나가는 모습까지도 결국 전부 찾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누른 영상 속엔 풀코스 골인 지점 근처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코너를 돌며 달려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속도도 빠르고 뛰어오는 탄력으로 미루어 보아 B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정말 마라톤 주자 같았다. 하루키가 말한 성실한 달리기의 힘이었겠지.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그 작은 얼굴이 보였는지 모르겠다. 눈에 띄는 2미터 팔 척 장신도 아니고, 뛰어오는 모습도 내가 생각한 것과는 느낌이 달랐지만 정말 그 많은 인파 속에서 B의 얼굴만 보였다. 뛰어오는 자세는 몰라도 그 표정은 어렴풋이 상상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일까?
하루키의 이야기를 읽고 나도 마라톤을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막연히 생각만. 글쎄 난 아무리 하루키가 좋아도 그런 이유로는 마라톤 풀코스는 달리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B는 풀코스를 완성해 냈다. 하루키가 말했던 페이스로.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 하루키 영감 별것 아니구나 싶었을까 아님 그 영감이 어떻게 이 속도로 달렸을까 일까. 의외로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은 한가득인데 물어볼 수가 없다. 내가 반년 간 B의 달리기 기록을 몰래 지켜봐 왔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 하겠다. 다음 주부터 나도 나가서 달려야겠다. 아마 이번에는 3달 정도 겨우 달리려나. 작심삼일이나 안 되면 다행이다. 아 그러기 전에 러닝화도 하나 사야 하는데.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 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2023.11.10. 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