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있었던 일이다. 급식시간이었다. 평소 "아 배고파 죽겠네"를 입에 달고 사는 H가 김치를 뜯어서 B의 쟁반에 슬쩍 올려놨다. B는 자기가 싫어하는 반찬만 골라서 남기는 애다.
"야 이거 왜 줘?" "그냥 먹어. 어차피 니가 좋아하는 거잖아." H가 면전에 대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B는 짧게 "어 고마워"라고 중얼거리더니 정말 다 먹어치웠다.
이 녀석들은 고마워, 미안해, 이런 말을 절대 직접적으로 안 한다. 대신 "야 이거 가져가" "아 니가 다 해버렸네" 같은 식으로 돌려서 표현한다. 배려인지 투정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오후에 J가 교실에서 코피를 펑펑 흘렸다. 잠깐 당황하는 사이에 D가 달려가서 휴지를 한 뭉치 가져다줬다. "야 고개 뒤로 젖히지 마 멍청아, 그럼 더 심해져." 놀리면서도 정확한 응급처치 방법을 알려주는 게 웃겼다.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는데, 카운터에 서 있던 P가 나를 봤다. "어 선생님!" 하고 반갑게 인사하더니 갑자기 어색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 나이 때 선생님을 사적인 공간에서 만나면 어색해하는 게 당연하지.
집에 와서 생각해봤다. 이 녀석들의 배려는 투박하고 서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진짜 같다.
속초 바다는 겨울이 되면 다른 얼굴을 한다. 여름의 그 다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회색 파도가 방파제를 때린다. 오빠가 입원했던 그 겨울, 나는 매일 그 바다를 봤다.
엄마의 심란한 연락을 받는 날이면 늘 바다 쪽으로 돌아서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그게 더 좋았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다 날려버릴 것 같아서. 엄마는 "네가 너무 힘들어할까봐 걱정된다"고 했지만, 사실 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더 힘든 것을 알았다.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A가 또 문제를 일으키고, B는 수업을 방해하고, C는 결석을 밥 먹듯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이런 건 시련도 아니다. 진짜 시련은 따로 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 오빠의 병처럼.
하지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시련도 지나간다. 오빠는 약을 먹으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아이들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속초 바다도 다시 파란색을 되찾았다.
시련이라는 건 결국 견뎌내는 것이구나. 이기는 것도, 극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견뎌내는 것. 겨울 바다처럼 묵묵히,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