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선

신앙과 자유

by 박민규

영국의 기독교 변증가 C.S.루이스는 우리가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인간 본성의 법칙 (Law of Human Nature)라고 부르며, 이것이 절대적인 선을 따르는 기준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법칙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그 결과 느끼는 가책을 자기중심적 사고와 합리화로 극복하려 한다. 그렇기에, 이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절대적인 도덕의 기준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우리는 무언가에 위배하여 닥쳐오는 불안이나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절대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그저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심리적 과정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태도로 사회를 구성하는 것에 반대한다. 루이스는 그 이유가 단순히 집단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률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과 항상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인 태도로 사회를 구성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는, 우리 내면의 도덕률이 어떠한 옳은 방향성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은 자신의 자아를 종종 넘어서는 결정을 하게 만든다는 점과, 우리가 이를 의식적으로 어길 수 있다는 점에서 본능과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본능과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며, 판단의 결정을 좌우하는 잠재적 요소로 작용한다.


모두가 갖고 있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더라도, 그 방향성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사실은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무의식 중에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발현되지 않는 하나의 보편적인 의식을 설명한다. 이것은 “양심”이다. C.S.루이스는 야심이 문화나 교육과 같은 외부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죄책감이나 후회를 막론하고 자유의지로 양심을 거스르는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양심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약자를 위한 결정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국가와 개인이 정의하는 선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하지만 이도 역시 사회적 조화와 개인의 성장과 같은 기본적인 선의 방향성을 가리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사회에선 선이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한 사회에선 공동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정의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궁극적으론 인간의 번영과 내적 평화와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경우이다.


모든 문화가 조화를 추구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인간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지속되고 유지되어 온 도덕 체계에는 일정한 공통 요소가 나타난다. 이는 협력과 공정성 그리고 신뢰와 같은 개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상대주의적 기준 속에서도 역시 근본적인 절대적인 선의 방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악만 존재한다면 그것을 악이라고 인식할 기준이 자체가 없어야 한다. 선이 있어야 악이 보이고,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보이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악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오히려 그 상태가 정상이 되어버려,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악은 더욱 악해지기 위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 즉, 자신에게 상대적인 선의 행위를 해야 한다. 악도 결국 상대적인 선을 향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선에서 분리된 또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리쳐드 파인만 교수의 “자석은 왜 끌어당기는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질문의 답이 상대의 교육적 수준에 따라 “왜?”라는 질문이 얼마나 복잡해질 수 있는지 설명한다. 자석이 끌어당기는 이유는 전자기력 때문인데, 이는 물리학에서 더 이상 “왜?”라고 묻기 힘든 기본적인 힘 (Fundamental Forces)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법칙이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절대적인 선의 기준과 도덕률은 물리적인 형상만 존재하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과학적인 근거로 증명할 수 없는 개념이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자연법칙과 도덕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심리학적 그리고 철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적절하다.


이전의 나는 이것이 인간의 본능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창조주라는 정신적인 존재를 연상했다. 외부적인 존재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한, 인간 사회와 역사에서 발현되는 현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절대적인 선이 인간의 번영과 조화랑 연결된다면, 진화의 산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번영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C.S.루이스는 희생과 용서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도 발현되는 절대적인 선이라고 설명하지만, 이 또한 개인의 가치관과 가치 판단이 우선시될 때 나타난다. 나아가 이상적인 행동을 실현시키자 하는 욕구 역시, 결국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상하고 싶은 이상적인 심리적 동기에서 비롯된다. C.S.루이스의 선과 악을 이해하는 개념은 치명적인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만약 인간의 번영과 행복을 절대적 선으로 규정하면, “인간의 번영=선”이라는 전재를 이미 내포한 채 판단하게 되고, 결과적으론 선과 악의 구분이 전제 자체에 의해 결정되므로 논리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


나는 인간이 경험하는 신앙의 복잡성과 모순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인간이 갖는 존재론적 한계 위에서만 성립 가능한 영역이다. 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일관성이 부족하다면, 가치관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따라서, 감정과 직관에 의존하는 신앙 또한,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야 하며,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강박사고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감정의 불확실성을 회피하려는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삶의 통제력을 확보하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의식, 철학, 신앙, 심리, 인간관계 그리고 사람 등 모든 것을 분석하게 되는 것 같다. 현상만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자아”라는 필터에 가려져 모든 것은 구조적 모순이 보이게 되는 것 같다. 돈은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필요로 하지만, 전 세계 부의 90%는 상위 10%의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정의와 평화는 결국 더 높은 권력과 무력에 의해 유지가 되며, 거짓도 얼마든지 필요에 의해 진실로 포장될 수 있고, 진실도 더 많은 거짓 앞에서 무의미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의 끝에서, 질문은 더 이상 신앙이나 도덕의 기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질문을 던지고 있는 주체, 즉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나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신앙이 정체성이라면, 신앙을 해체하고 분석하려는 이 태도 또한 하나의 정체성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욕구, 감정과 직관을 불신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요구하는 강박은 과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일까? 아니면 또 다른 조건화 된 반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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