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블라나 여행기]
지구가 두 쪽 나지 않았기에 쓰는 글
여행 둘째 날부터 핸드폰이 이상했다. 버퍼링으로 시작해 흰색 화면으로 뒤덮이거나 초록색 줄이 나타났다. 놀란 마음에 검색했더니 LCD판이 문제라며 수리 센터에 가보라는 글뿐. 지금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부디 여행이 끝날 때까지만 버텨 주길 바랐지만 휴대폰의 건강은 내 걱정보다 심각했다.
류블라나에서 자그레브로 넘어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역 앞에 있는 맥도날드에 갔다. 혹시라도 버스에 타기 전에 휴대폰이 망가지면 지도를 볼 수 없으니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자그레브에 도착하면 오후 11시 30분, 12시면 체크인이 마감되는 호스텔에 온전히 도착하기 위해선 빠른 이동이 필요했다. 나는 다이어리를 펼쳤고 내가 머물 호스텔의 이름을 적은 뒤 지도 어플을 보려 폰을 들었고 폰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완전히 흰색으로 변해버린 화면처럼 내 머릿속도 백지장이 되었다. 시간도 알 수 없으니 남은 커피를 몽땅 마셔버리고 정류장으로 나갔다. 주변을 둘러봐도 한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로 시간은 흘렀고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길래 나도 따라간 뒤 운전사분께 상황을 설명하고 다행히 티켓 대신 이름을 확인한 뒤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어떻게 호스텔에 갈까. 버스 안에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의 고민을 반복했고 옆자리 또래 여자애에게 구글맵을 사용할 수 있을지 물었고 그녀는 폰을 내줬다. 자그레브 정류장부터 게스트하우스까지의 길을 검색했고 잘 보이지 않는 버스 안에서 다이어리에 폰 불빛을 비추고 지도 보기를 반복하며 트램 정류장의 위치, 트램의 진행 방향, 내가 거쳐야 하는 정류장, 대략적인 소요 시간, 트램에서 내린 후 걸어가는 방향과 게스트하우스 주변에 위치한 가게의 이름들을 적었다.
기사님의 과속 덕분에 예상보다 20분 먼저 자그레브역에 도착했으니 모든 게 순조로울줄 알았다. 트램 티켓을 구매하는 방법은 미리 알아놨기에 티켓 판매처를 찾아야했다. 오후 11시 10분, 눈앞에 보이는 판매처는 모두 문을 닫았고 눈알과 머리를 다시 굴리며 주변 여자분에게 말을 걸었다. 티켓 판매처가 어디인지 물었더니 모두 닫았다고 답한 그녀는 자기의 가방을 뒤적거린 뒤 웃으며 티켓을 하나 건내줬다. '쏘땡스'를 수어번 반복한 뒤 트램에 올랐다. 곧 다이어리를 펼쳤고 트램이 지나치는 정류장과 적어놓은 역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마치 조선시대에 갓을 쓰고 서울에 올라 지도를 두리번대며 길을 찾는 김 서방이 된 기분이었다.
12시가 되기 전 숙소 앞에 도착했으니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한국인 스텝 분들이 상주하는 곳이기에 벨을 누른 뒤에도 스텝이 나오지 않으면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란 글이 적혀있었다. 폰이 망가져 전화도 톡도 못하는 나는 그저 10분 동안 계속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며 이 계단에서 어떤 자세로 잠들어야 할 지 고민했다. 그때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2층에서 1층을 향해 익스큐즈미를 외쳤다. 그녀에게 부탁해 호스텔 문 앞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근처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중이라는 스탭 분의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휴대폰을 사야 하지만 지도도, 카드에 든 돈도 없다. 있는 거라곤 어제 잠들기전 잠시 이야기를 나눈 또래의 여자 한국인뿐.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인사를 나눴고 내 상황을 설명한 뒤 함께 시장에 갔다가 휴대폰샵에 가기로 했다. 해외 생활 중엔 온갖 인증서가 필요하기에 폰을 새로 사기보단 고치길 원했고 먼저 방문한 샵에선 주변에 위치한 수리점들을 소개해줬다. 처음 간 곳은 290유로(약 43만원), 두 번째는 영업 종료, 세 번째는 300유로(약 45만원)을 불렀다. 40만 원주고 산 중고폰인데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중 세 번째 샵의 주인 분은 250유로의 같은 기종 중고폰을 제안했고 최선이라 생각해 알겠다고 답한 뒤 데이터를 옮기기 위해 한 시간 후 방문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동안 주변 맛집으로 소개받은 곳에 가서 도움을 준 친구에게 작은 식사를 대접한 뒤 그녀가 역으로 나에게 선물해준 티켓을 손에 꼭 쥔채 수리점으로 향하는 트램에 올랐다.
웃음꽃이 핀 나를 맞이한 수리점 주인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판이 아닌 충전핀 쪽에 문제이며 오늘 내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존 폰에 든 정보를 옮기지 못한다는 말에 삼성 혹은 구글 계정을 연동해보려 했다. 한국 번호의 문자 수신도 정지했고, 계정 인증을 받을 수 있는 기기가 아무것도 없기에 패닉에 잠시 빠졌으나 데이터는 둘째치고 일단 돈부터 내야 했다. '잇츠 오케이'를 외치며 유로 충전 어플을 실행했다. 앗뿔싸라는 말을 정말 오랜만에 쓰지만 정말 앗뿔싸였다. 온갖 은행 어플 인증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고 여권을 들고 영상 통화 인증을 진행하며 진땀뺀 결과 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
오후 2시 휴대폰과의 전쟁이 끝나 호스텔에서 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밖으로 향했다. 무작정 걸었다. 오후 4시에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피스타치오 맛을 주문했지만 그저 라떼 맛인 커피를 마시며 다시 걸었다. 구글에서 보던 자그레브의 성들이 보였고 오후 10시까지 하는 박물관을 발견해 그곳으로 향했다.
'깨진 관계에 대한 박물관' 이별에 대한 물건과 사연이 전시된 공간이다. 한국어 해설이 있다는 안내문을 봤지만 이렇게 책 한 권이나 제공할 줄은. 이별의 물건들과 함께 산문집에 빠지는 기분이었고 곧 전시자와 전시물의 기분과 동화됐다.
토를 하고 싶었다. 어젯밤부터 미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과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다는 안정감, 해가 지기 전 숙소에 들어가기 위해 빨리한 걸음으로 가빠진 숨 그리고 그들로부터 받은 우울감. 오늘의 내가 가지고 있던 갈등과 버물리며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고 방문자들이 남긴 기분 옆에 펜촉을 두었다.
… 토를 하고 싶은 기분이다. 무엇이든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이다. 쉬운데 이건 왜 어려울까. 시도해보지 않았으니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어렵다고 하지. 허나 해본다고 쉬워지진 않겠지.
펜촉을 제자리에 두며 한숨을 크게 쉬고 나니 온전한 상태로 돌아오려는 마음을 느꼈다. 때론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상황이 몰아치기도 한다. 가끔은 끝을 각오하며 시도하기도 한다. 실패하면 뭐 어때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불안에 떠는 나를 느낀다. 무엇이 정답일지 모르나 평소와 같음을 택한다면 나는 더 쓸 수 없는 마음이 될테다. 바라보던 것에 대응하고 대화하며 때론 대척하며 더 적을 수 있는 마음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