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싱키 여행기]
MOOMINVALLEY
무민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곳.
저녁 11시가 넘어 물을 사러 혼자 마트에 다녀왔다.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보랏빛으로 물든 길을 걸었다. 이곳 사람들은 저마다의 수단을 이용해 집으로 향했고 이 정도의 치안과 여유라면 헬싱키에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무민 기념품샵에서 그동안의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사이즈의 마그넷을 발견했다. 오른쪽 위엔 나침반 같은 것이 있고 초록색과 검은색으로 이뤄진 자석이었다. 초록은 무민 밸리의 울창한 나무와 풀을, 검정은 바다의 물결을 그리고 있었다. 마그넷 포장지 뒷면은 여름과 동면을 준비하는 무민들의 모습을 나에게 알려줬다. 이런 곳에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며 나는 어떤 곳에 살고 싶은 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싶어 마그넷을 구매해봤다.
살고 싶은 도시에 대한 정의는 없으나 집에 대한 정의는 있다. 들어서자마자 있는 신발장 건너 옆면에 책장이 있어야 한다. 조승연님 유튜브를 종종 보는데 옛날 프랑스인들의 집엔 이런식으로 책장이 있었다고 한다. 손님이 집을 찾으면 신발장 앞에 서서는 "어! 너 이 책 읽었어?, 나도 읽었는데!"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셈이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방식인가.
내가 정말 그런 책장을 마련하고 손님을 맞이하게 된 상황을 상상해봤다. 손님이 어떤 책을 골라주면 좋을까. 아무래도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이 좋겠다. 이 책을 고른 손님은 내게 어떤 말을 건낼까. 재밌었다 말할까, 흥미롭다 말할까, 너무 어렵다고 말할까. 아무래도 흥미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좋겠다. 전반부를 끝내기가 너무 어려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뭔지 모르게 닥친 폭풍의 분위기에 휩쓸리듯 읽어버린 나는 그 사람의 흥미 포인트를 몇시간이고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비슷한 맥락으로 CD들을 위한 선반도 놓고 싶다. 갓 스물이 되고 음악을 열심히 듣던 나는 한 아이돌 그룹의 앨범에 빠져버렸다. 그 가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앨범'이란 물건에 빠져들었다. 이것을 만들어낸 기획자들의 아이디어에 눈을 번쩍 뜬 것인데 이후에 온라인 중고 마켓을 하루에 몇 시간씩 보며 중고 앨범을 끊임없이 사 모았다. 무료 나눔 앨범 한 장을 받으러 왕복 3시간 걸리는 곳에 다녀온 적도 있다. 그렇게 모은 앨범은 백 장을 넘겼고 CD의 전면이 보이는 플레이어 또한 문고리 거래로 중고 구매했다. 서울에서 첫 자취를 시작했을 땐 아이돌, 힙합, 7080, POP 종류별로 한두 장씩 집에 구비해두었다. 그러고 친구와 함께 무드등을 켜고 와인을 마시며 노래를 들었다. 이때도 “어!, 너 이 노래 알아?”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반면 TV는 절대 사지 않을 예정이다. 내가 고등학교 수험 생활을 끝낼 때까지 우리 집엔 TV가 없었다. 아빠는 원했으나 엄마가 반대했다. 대학교가 정해진 직후 우리 집에 TV가 들어왔고 난 이것의 단점을 여실히 깨달았다. 하루가 무료하고 지루할 때면 어김없이 리모컨을 찾는다. 수백 개의 채널 중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겠냔 생각으로 프로그램을 탐색한 뒤 몇 시간이고 그것을 틀어둔다. 빛과 소리는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도달하기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한다. 즐거움을 가져오고 싶었지만 단절도 함께 구매한 셈이다.
무민하우스에 사는 무민마마는 집 앞 정원을 가꾸고 꽃을 피워내는 것이 취미다. 다른 무민을 초대해 꽃에 대해 얘기하고 때론 여행을 떠난다. 낯선 곳에 도착해도 그들의 마음은 편하기만 한데 그들에겐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어떤 방해도 없이 온전히 집중하고 소통할 수 있다. 나도 집이 그런 공간이 되길 꿈꾼다. 현관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를 반겨주는 책과 CD들. 우리를 연결해주는 책을 발견했다며 기뻐하는 손님들. 그들과 나눌 이야기를 기다리며 프랑스 곳곳의 서점에서 예쁜 책들을 모으는 중이다.
ps. 서점에 가도 제본된 부분에 얇게 인쇄된 제목을 보여주는 곳보다 덩치 좋게 한 자리 차지하듯 책의 표지를 보여주는 곳이 좋다. 마치 "우리 서점에서 이 만큼의 공간을 내어줄 만큼 훌륭한 책입니다!"라고 얘기하는 서점 주인분의 의기양양함이 그려진다. 그런 당당함을 닯고 싶던 과거의 나는 책 선반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십자 드라이버로 오래된 나무걸이를 모두 분해하고 내 방문을 꽁꽁 닫고 마스크를 쓴 채 맨손으로 톱질을 했다.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이것들을 한데 모아 오직 두 권의 표지를 보여주는 선반을 만들었다. 이때의 나는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 하는 무모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