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우리를 죽이는 병

<보석을 빼앗긴 아이>

by 작은콩
5-0.jpg
5-1.jpg
5-2.jpg
5-3.jpg
5-4.jpg
5-5.jpg
5-6.jpg
5-7.jpg
5-8.jpg
5-9.jpg
5-10.jpg
5-11.jpg
5-12.jpg
5-13.jpg
5-14.jpg
5-15.jpg
5-16.jpg




부드럽게 우리를 죽이는 병


(진 킬본의 <부드럽게 여성을 죽이는 법> 패러디)








류마티스 관절염은 말하자면 다정하게 잔인한 병이다.



처음엔 가벼운 증상으로 시작했다. 운 좋게 초기에 발견해 약만 조금 먹으면 증상이 잡혔고, 통증이 없으니 일상에서 병의 존재를 잊기 쉬웠다. 그땐 몰랐다. 이 병은 골든타임을 놓치면 끝이라는 것을.

초기에 빨리 잡으려면 식단과 운동과 같은 생활습관을 교정하고, 약도 정확하게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병을 우습게 본 자에게 처벌은 엄중했다. 증세가 괜찮아 보이니 괜히 약도 한번 좀 끊어보고(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식단관리에 대해서는 아예 몰랐다.(이건 사실 병원에서 안 알려 줬다. 지금도 물어보면 별 관련 없다고 쉽게 말한다.*)


운동도 관절에 도움이 되는 운동보다는 그냥 하고 싶은 빡센 운동을 하면서 관절 연골을 갉아먹었다. 염증질환인데 알콜도 맘대로 마셨다.





증세가 급격히 나빠졌다.

1. 한 알만 먹어도 되던 약을 갑자기 두세 개씩 증량했고, 그래도 잡히지 않자 스테로이드와 진통제도 투여됐다. 손가락 관절 변형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처음 변형된 관절은 오른손 새끼손가락 작은 마디였다. 그림 그릴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부분이다. 많이 쓰는 부위니 당연히 약하고, 염증이 쉽게 생겼던 것 같다. 그러나 작은 마디였기에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다.

아픈 부위는 쓰면 안 되는데, 그냥 진통제로 버텨가며 작업했다. 그림도 그리고 심지어 도예도 했다.(도예는 손과 손목 힘이 무지막지하게 많이 필요한 작업이다!)




2.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때만 해도 다이어트한답시고 배고플 때도 끼니 시간 기다려서 정량만 먹으려던 나였다. 염증이 체내에 있으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몸에서 에너지를 쓴다.(암환자가 가만히 있어도 살이 빠지는 이유다. 세포분열을 계속하고 염증으로 고생하니 에너지가 부족한 거다.) 그런데 그런 원리를 모르니 살찔까 봐 자꾸만 적게 먹으려고 했다.




3. 점차 심해지자 가끔 체력이 0이 되는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있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 와중에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턱 아래가 자꾸 붓는데(문페이스) 그게 속상했다. 물론 병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바보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행히 2년 정도 전부터는 늦게라도 깨달아 식단은 물론 운동법, 입는 옷과 신발까지 바꾸고 심지어 회사도 나오면서 병의 진행을 늦추었지만. 여전히 작업은 하고 있기에 손 염증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리기를 좋아했던 사람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리기를 좋아해서 그렸는데 칭찬도 듣고 다들 좋아해 주니 더 신나서 많이 그렸다. 피카소 같은 1%의 재능을 타고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나 정도면 글과 그림은 나름 잘하지 않나, 한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시작했던 작업은 이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작업은 이 혼란하고 한 치 앞도 모르는 병자의 삶에서 늘 등대처럼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기둥이다. 작업이 없었으면 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신체적 고통과 험난한 현실의 벽을 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저 주저앉아 울었을 것이다.





이제야 자신이 누군지 알아가고 있는데. 이제야 표현하고 싶은 것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 지금도 검지에 생긴 낭종 때문에 중간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그마저도 많이 못해서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하게 감동적으로 꿈을 좇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병의 말을 잘 들으면 증세가 완화된다. 쉬랄 때 쉬고 먹으랄 때 먹기.


하지만 듣지 않는 순간 고통이 시작되는 이 병.



고통이 없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다가, 시작되면 모든 생활이 빼앗기는 병.





앞으로 어떤 꿈을 갖든지 어차피 그것을 가로막을 거대한 벽.

그리고 결국 병 앞에 조련당할 나약한 몸뚱아리.






나는 끝내, 내가 찾는 나만의 보석, 즉 나아갈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







관련된 과거 글: <아파도 놓을 수 없는 것들>

https://blog.naver.com/vege_bab/222281942203

블로그에 올렸던 글인데 꿈과 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스타툰: https://www.instagram.com/small_kong_/






*발병 이후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시작했고, 알코올과 카페인은 완전히 끊었습니다. 식단관리는 사람에 따라 큰 효용을 보는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전 효과를 보았지만 아닌 분도 있을 수 있으니 똑같이 무리해서 따라 하진 마세요. 하지만 굳이 의견을 붙이자면.. 염증과 식생활은 관련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