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우, 시공사
뭔가를 하소연하고 싶지만, 뭔가를 마음껏 꺼내놓을 수 없을 때 다른 이들은 무얼 읽을까?
곰곰이 되뇌어 보니,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왜인지 모르게 이도우 작가님의 소설을 꺼내읽곤 했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라는 책도 그중 하나다.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어른이라서, 혹은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서 망설여질 때 이도우 작가님의 책을 추천한다. 세상의 모든 기분을 덮어버리는 포근한 눈송이 되어, 혹은 따뜻한 등불이 되어 당신의 옆을 가만히 지켜줄 테니까.
이 소설을 처음 접했던 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도우 작가님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었다는 건 정확하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어떻게 접하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재미있게 읽은 나머지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던 듯싶다.
이 소설을 어느 계절에, 어느 시간대에 즐겨 읽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그래도 한 가지 기억은 또렷하다. 이 책의 책장을 넘길 때면, 언제나 난 최대한 웅크린 채였다는 것.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이 책을 손에 쥘 때마다 협탁 위의 노란 스탠드 불을 켜고 초록 이파리가 드리워진 하얀 이불 속에 들어가 스스로를 푹신하게 감싸 안았었다.
이 소설은 꽤 소소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미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교육적 괴리감에 부딪힌 혜원. 시골에서 조용히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소박한 인물에 불과하나, 왠지 모르게 남몰래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은섭. 혜원에겐 그저 편한 친구 같고 엄마 같은 명이 이모. 그리고 겨울 속에 홀로 낡아가는 호두하우스 펜션과 기와지붕이 정겨운 굿나잇책방.
이 소설에 담긴 클리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혜원을 좋아하고 있는 은섭과 혜원의 덤덤한 배경이 되어주는 이모가 꽤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은섭이 혜원이 생각하는 것보다 혜원의 곁을 더 오래 맴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도 확실한 느낌이겠다. 이 클리셰들은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더욱 촘촘히, 그리고 서서히 파스텔톤으로 물들어가기 때문에 점차적인 재미를 더한다. (게다가 설렘은 두 스푼씩 덤으로 추가된다고나 할까.)
굿나잇책방이 소설 속에서 꽤 중요한 장소인 만큼, 배경적인 특성상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한다. 덕분에 서점이 주는 작고 따뜻한 느낌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독자들에겐 익숙한 클리셰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비록 이도우 작가님의 소설이 조금 더 앞선 시점에 태어났을지라도. ㅎㅎ
이 소설이 드라마로 방영이 되었다는 것은 드라마가 종영하고서 알게 되었다. 소설을 읽었던 시점이 분명 드라마가 방영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방영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 놓쳐버렸다. 매체가 돌리는 목청 높은 홍보조차 접하지 못했을 정도로 아무래도 내가 당시에 몹시 바빴던 모양이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이끌어 가는 중심축은 혜원과 은섭이다. 한때 동창이었던 두 사람이 옛 기억을 더듬으며 짝사랑을 추억하고, 옛날의 기억과 상처를 더듬으며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은 소설을 보는 내내 고요한 일렁임을 준다. 이렇게나 작고도 잔잔한 일렁임이 쌓여 이윽고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잔잔하던 일렁임은 금세 벅찬 여운이 되어 조용히 떠나간다.
이렇듯,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은 바로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분위기'에 있다. 그 분위기는 아늑할 수도, 혹은 은밀하고도 비밀스러울 수도 있다. 이 독특하고도 고요한 분위기는 '겨울'이라는 계절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다. 주변의 소리를 고요히 잠재우는 '겨울'의 특성을 빌려, 두 사람이 간직한 비밀을 포근하게 덮어주고. 하얗고도 푹신한 시골의 풍경으로 은섭이 지닌 따스한 심성을, 그리고 그가 간직한 사랑을 더없이 순수하게 비추어준다. 그래서 그런지, 혜원이 얻는 위로는 봄보다 더 포근하게 여겨진다. 오직 굿나잇 책방에서 겪을 수 있는 오래된 난로의 투박한 온기처럼 말이다.
어쨌든 인생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을 곁에 남겨가는 거지 싶어서.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래요, 인정하자면 저는 짝사랑을 하고 있을 때가 참 좋았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와닿았거든요.
고백하자면 작년과 재작년이 내겐 그리 평온하지 않았다. 힘든 일 투성이었고, 그로 인해 비롯된 초라한 자괴감은 마치 단솔손님처럼 잊을 만하면 찾아왔다. 게다가 새해의 서막 역시 작년에 뿌려놓은 일에 대한 성적표를 부여받는 걸로 시작했다. 그래서 해가 바뀌었음에도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다.
뭐, 그렇다고 하여 매 순간을 주눅 들어 있는 건 아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오뚝이 같은 기질 덕에 다행히 나는 어떤 고민이든 3일 내로 훌훌 털어버리는 법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론 뼈에 서리가 끼는 것처럼 이유 모를 냉기가 종종 척추를 타고 오를 때가 있다. 이걸 그대로 방치하면 공황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뼈마디를 타고 화한 냉기가 퍼지는 것만 같은 감각. 나는 이 감각을 무척이나 무서워한다. 화한 박하와 같은 감각이 온 몸을 잠식하면 곧이어 알 수 없는 불안이 급수적으로 늘어날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서늘한 기운이 뼈마디를 가볍게 스치는 듯한 기분이 들어도 그 즉시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한다. 자기 연민에 북받쳐 눈물이 터질 것 같아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속상한 날에도. 여지없이 뜨거운 물 아래에 선다. 그러고는 '괜찮아, 아무개(본명).', '괜찮아, 괜찮아.', '나는 정말 괜찮아.'란 단말마를 속으로 끊임없이 되뇐다.
나는 그렇게 나를 지킨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 행동을 보인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이 어여쁜 인물들은 각자 본인들만의 상처 치료법을 처방하고 있는 이들이다. 혜원은 호두하우스로 찾아옴으로써. 은섭은 혜원과 함께 산속 오두막집 위로 올라가 봄으로써. 본인들이 가진 상처와 얼룩을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연애 소설인 동시에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혜원와 은섭이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각자가 지닌 상처로부터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네 상처에도 잔잔한 안부를 묻는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게 될 당신도 그러하기를.
내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선물 받았던 덤덤한 위로처럼, 당신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당신의 상처를 가만히 쓸어주기를 바란다. 날씨가 좋으면 분명 좋은 날도 다시 찾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