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전승희 및 윤지관 번역, 민음사.
첫 글로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품속에 오직 한 권만을 남겨야 한다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고를 거니까. :)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땐 수능이 끝난 직후였다. 이른 아침부터 잠을 이루어야 하는 늦은 시각까지 학교 책상에 붙잡혀 있어야만 하던 일상에서 탈출해, 처음으로 자유라는 걸 맛보았을 때였고. 텅 빈 시간을 어떻게 메꿔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였다. 출석 일수를 채워야 하니 일단 등교는 하고 있는데, 수업을 하지 않고 내리 영화만 보여주는 오전 시간이 감개무량하면서도 한편으론 어색했다. 아마도 뭔가를 읽지 않게 된 일상이 낯설었던 듯싶다.
그맘때 즈음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제인 오스틴에겐 손에 꼽는 역작이 한둘이 아님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역시나 첫 손길은 오만과 편견으로 향했다. '제인 오스틴'하면 '오만과 편견'을 선두로 떠올리는 여느 매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 오만과 편견이 가장 궁금했다. 아무래도 성인이 되지 못한 19살의 감성이란 꽤 대중적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당시의 내 취향이 지극히 대중적이었을 수도.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라곤 없는 베넷가. 딸이 다섯이나 되지만, 집안이 일구어 놓은 재산은 결코 딸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다. 베넷가의 재산은 모두 목사인 사촌에게 귀속될 예정이었다.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여성들이 혹독한 신세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결혼. 자매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근방에 위치한 네더필드 저택에 젊은 총각이 들어왔다. 결혼을 하지 않은, 심지어 부유한 총각인 빙리가 마을에 왔다는 작은 소식 하나로 온 마을은 들썩였다. 베넷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성한 딸들이 다섯이나 있지만 아직 시집을 간 딸은 없었기에 자매들의 엄마, 베넷 부인은 그 누구보다도 빙리의 입성을 반긴다. 그리고 베넷 부인의 소원은 머지않아 곧 현실이 된다.
빙리는 베넷가의 맏딸, 제인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게 되니까.
사실, 빙리의 네더필드 입성에는 오랜 죽마고우가 동행했다. 빙리 못지않게 부유하면서도 뒤떨어지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 다아시가 바로 그의 오랜 친구다. 다아시는 그들을 환영하는 첫 무도회에서 실례되는 언사, 그리고 무례한(엘리자베스의 기준에서의 무례한) 행동으로 베넷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에게 오만한 남자라는 인상을 주게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그가 오만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의 진면모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이 소설은 베넷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 베넷과 다아시가 오만과 편견을 이겨내고 서로의 진심을 이어가는 과정을 감정의 변화에 따라 감각적으로, 그리고 서정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여자와
부유한 집안의 남자
이 소설이 가장 뻔하게 제시하고 있는 클리셰이지만,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결코 뻔하지 않다. 흔하디흔한 장치를 그저 빌려왔을 뿐, 엘리자베스가 다아시를 밀어내는 이유와 마음을 열어내는 과정은 섬세함 그 자체이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저렇게나 세분화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정도로 오만과 편견은 살면서 한 번쯤 가져보았을 생각과 기분을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은 당시 시대 상황 속 흔한 여성과는 달랐다. 엘리자베스는 순종적이기보다는 당차고 이성적이었으며, 어떠한 행동에 있어 항상 명확한 이유와 근거를 지닌 여성이었다.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지만, 엘리자베스는 결코 로맨스를 상위 목표로 설정하는 여성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부하는 여성상에 가깝다. 명목상 시대가 지닌 예의와 예절을 따라가고 있지만, 내면엔 주체성이 꿈틀대는 모습이 소설 속에 자주 묘사된다. 그래서 이 소설이 고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많은 여성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존경과 존중보다도
더욱더 그녀 마음속에 간과할 수 없는
호감의 동기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감사였다.
그녀는 그를 존경했고, 높이 평가했으며, 그에게 감사했고,
그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마음이 맞는다는 것은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체질, 즐거움을 더해주는 명랑한 성격, 밖에서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서로 간에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애정과 슬기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나이대별, 그리고 반복해서 읽은 횟수에 따라 공감하는 부분이 달라진다. 20대 초반 때의 내가 밑줄 그었던 부분과 20대 후반 때의 내가 밑줄 쳤던 부분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제인 오스틴이 그린 생각의 흔적들을 따라가며 내 생각의 흔적들을 시기별로 쫓아가는 것도 꽤 잔잔한 즐거움이 된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혹은 읽은 지 오래지만 머리에서 잊힌지 오래라면. 책장을 펼쳐보시길 추천한다. 엘리자베스는 결코 독자들을 지루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