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안과 잘 헤어지는 방법 알고 계신 분 손!
지난 토요일, 교수님께 제출한 기획안에 대해 피드백을 받았다. 그 기획안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끙끙거리며 퇴고한 결과물이었다. 이제 막 퇴고를 끝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그 말인즉, 기획안이 내 새끼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내 기획안은 해당 공모전과 성격이 맞지 않아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좋은 말을 함께 덧붙이긴 하셨지만, 그래도 결론은 “다시”였다.
‘처음부터 다시라니….’
힘이 쭉 빠졌다. T.P.O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나에게 취한 얼굴로 ‘나 어때?’하고 묻는 꼴이 창피했다. 그날 이후, 부정과 분노를 느끼다 우울 상태에 빠져있었다. 나는 지금 내 새끼를 떠나보내는 중이다.
그동안 느낀 내 감정의 변화 상태는 이렇다.
1. 부정 : “교수님이 뭘 잘 모르시네!”
현직 작가이며 오랜 시간 현직에서 나와 같은 지망생을 수두룩하게 만나고 가르친 교수님이다. 그런 교수님을 상대로 마음속으로 ‘요즘 트렌드를 잘 모르시는 건가?’ 아니면 ‘잘 안 읽으신 건가?’. 피드백을 곱씹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2. 분노 : “내 기획안 제대로 안 읽었네!”
‘내가 얼마나 피땀눈물을 흘리며 쓴 건데. 이게 재미없다고? 참나.’ 하며 울컥 화가 올라왔다. 급기야 아무런 죄도 없는 세상까지 탓하며 열등감을 먹이로 한 화가 주체할 수 끓어오르며 부정과 분노가 뒤섞인 채 반복적으로 요동쳤다.
3. 타협 : “교수님 말대로 바꿔볼까?”
‘그래도 교수님이 말씀인데 다시 바꿔볼까?’ 고민하며 고쳐 본다. 하지만, 내가 쓰고 싶은 소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재미가 없다. 글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가다가 다시 분노의 상태가 된다. (절레절레)
4. 우울 : “나 같은 게 무슨 글을 쓴다고.”
무거운 마음과 생각으로 한 줄 쓰기도 어려워진다. 종일 붙잡고 있지만, 글은 여전히 제자리다. 아득바득 겨우 써서 마침표를 찍은 문장들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는다. 문장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다.
‘그래, 이런 사람들이 글 쓰는 거지. 나 같은 게 무슨 글을 쓴다고…’.
한 문단도 완성하지 못하는 나를 혐오하며 내 속에 구덩이를 파 들어앉았다.
5. 수용 : “미쳤어. 내가 이렇게 썼다고?”
다시 제출한 기획안을 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분명 퇴고했는데 여기저기 고칠 것투성이다. 콩깍지가 벗겨진 것이다. 해당 공모전의 수상작을 살펴보니 교수님의 말씀대로 지금 이대로라면 그 공모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 맞았다. 톤도 호흡도 관계도 모두 손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느낀 감정들이다. 다 쓰고 보니 너무 창피하다.
지우고 싶지만 꾹 참아 보는 이유는, 구덩이에 나를 처박은 것도 나지만,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것도 결국은 나라는 사실을 내게 말해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