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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는 하루가 지나간다

by 맹그리

감사 일기를 썼다.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다거나 충만하다고 느꼈다거나 '좋아! 결심했어. 이제부터 새로운 인간이 되겠어.' 같은 감정을 느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수강 중인 강의의 참여 점수를 받기 위해 쓴 것뿐이었으니까.


몇 줄 쓰다 지우고 또 쓰다 지우길 반복하는 사이, 노트북 화면에 비친 내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자리했다.


'이런 것도 감사할 거리가 되나?'


조금은 민망하고 어색한 기분으로 마침내 게시글 등록 버튼을 클릭했다.


내가 적은 오늘의 감사는 이러했다.


1. 오늘 아침, 아무 탈 없이 눈을 떴다.

2. 현관문을 열자 들이밀 듯 집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가을바람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3. 가족들이 무탈하게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4. 지금까지 무탈하게 하루를 마무리 중이다.

5. 과거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이번 강의의 주제였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비슷한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식하며 쓴 건 아닌데 ‘무탈하게’ ,‘무사히’, ‘아무 탈 없이’.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생각과 걱정이 많아 불안도 높은 나에게 하루를 별일 없이 시작하고, 별일 없이 끝낸다는 건 매우 중요하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는 걸 이 글을 쓰고 나서야 깨달았다.


야근을 마치고 들어온 남편이 배고프다며 냉장고를 여는 소리, 나 대신 잔소리를 늘어놓는 딸들의 익숙한 목소리가 방문 너머 들려온다.


지금 이 순간, 평범하고 조용한 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데 부족한 것만 찾아 떠올리는 가난한 생각이 소중한 순간을 무심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도. 수많은 '무탈한 하루'가 이어져 ‘오늘’까지 닿았다. 당연한 날은 없다.

그러니 오늘도 별일 없는 하루가 지나갔음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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