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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마건 Feb 14. 2021

우린 그에게 동일시되지 않는다. (상)

영화 <퍼펙트 블루> (1998)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관적인 의견이 들어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퍼펙트 블루>는 아이돌 가수 미마가 배우로 전향하면서 마주하게 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사회를 담는다. 일본 사회가 여성에게 바라는 섹슈얼리티의 이중성은 주인공 미마가 자아가 분열되는 고통을 야기한다.

 우린 미마의 고통을 보며 미마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가해자에게 분노할 수 있다. 혹은 고통에서 성장한 미마가 오히려 무섭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고통을 이겨낸 아리따운 젊은 여성'의 이미지만 남기기에는 영화와 캐릭터 안에 여운처럼 남겨진 텁지근한 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미마의 고통은 '괴물화된 여성'을 만든다. 여성 캐릭터의 괴물성이 <퍼펙트 블루>에서 어떻게, 왜 등장하는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바바라 크리드  ‘여성의 괴물성’ 이론과 로라 멀비의 이론을 참고하여 자세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이 글은 여성 캐릭터의 괴물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결국 영화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 주체 대상에게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한다.



미마는 사진작가를 죽였을까?

   아이돌에서 배우로 전향한 미마의 주변에는 따가운 시선이 도사린다. 미마는 서둘러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야 했다. 어리고 힘없는 미마는 소속사 사장과 촬영 관계자들 말에 순종한다.

 상품으로 소비되는 미마는 자신의 의사를 진실되게 밝히지 못한다. 그 과정이자 결과로 그는 강간 장면을 촬영하게 된다. 이후 아이돌이었던 자신의 환영이 나타나 진짜 미마의 모습은 자신이라며 ‘더러워진 아이돌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시는 그 빛(순결하고 깨끗한 아이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로 미마를 괴롭힌다.

  미마는 아이돌 이미지를 탈피하고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계속해서 노출을 감행해야 하는 작품, 화보를 찍는다. 미마는 점점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며 정신이 분열된다. 한편 미마의 성 상품화와 성적 학대에 가담한 인물들이 잔인하게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마처럼 보이는 피자 배달부가 누드 화보집을 찍었던 사진작가를 죽이는 장면부터 영화는 자극적인 살인과 폭력의 과정을 과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는 내용상 미마에게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가한 사람들이 죽었다는 정보를 줌과 동시에 점프컷(격한 장면 전환으로 연속성이 갖는 흐름을 깨뜨리는 편집을 말하는 영화 용어/ 두산백과)과 매치 컷(시각적으로 유사한 두 장면(숏, shot)을 이어 붙이는 필름 편집 방식)을 매치시켜 미마가 느끼고 있는 불안하고 분열되는 심리 상태를 관객들이 알게 한다. 관객들은 이로써 미마가 점점 괴물화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미마를 괴물이 되었음을 관객들이 크게 인식한 장면은 사진작가를 죽이는 장면과 다음 장면일 것이다.

 피자 배달부가 사진작가를 죽이기 직전에는 시공간이 갑자기 전환되는 하루가 반복되면서 미마가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쇼트 순서대로 캡처. 점프컷과 매치 컷이 섞여 있다.


   같은 장면처럼 보이는 쇼트들이 있지만 다 다른 쇼트들이다. 뒤에서 두 번째 사진은 웹사이트 '미마의 방'에 올라온 사진이다. 여기서 미마가 들고 있는 종이 가방을 기억하자.


 미마는 자신의 방에서 갑자기 일어나고 촬영장에서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는다. NG를 내고 촬영이 중단될 때 어디선가 나타난 미마니아(미마의 스토커)를 보고 놀라지만, 곧 미마니아는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밤이 되면 같은 뉴스가 흘러나오며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붉은 옷을 입은 루미와 차를 마신다. 이 하루가 드라마 촬영 감독의 ‘테이크 X!’ 소리와 함께 반복된다. (미마는 자신의 일상을 관객이 보는 점프컷처럼 겪고 있다.) 지친 모습의 미마는 웹사이트 ‘미마의 방’에 게시된 환하게 웃으며 쇼핑했다는 글과 사진을 보며 오늘 자신이 쇼핑을 했다는 걸 인지한다.


 

 잔인하게 사진작가가 살해되는 장면 이후 미마는 자신의 방에서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소속사 사장의 전화를 통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정말 사진작가가 살해당했다는 걸 알게 되고 급하게 옷을 입던 미마는 옷장에서 피가 묻은 옷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미마의 행동과 미마의 집에서 나타난 증거물들로 미마와 관객 모두 미마가 범인임에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루미’와 실제 감독의 계략이 숨어있다.


  같은 장면을 촬영했던 것은 날씨가 좋지 않아 촬영이 중단되었고 밤마다 반복되었던 같은 상황, 옷장에 들어있던 피 묻은 옷은 루미가 연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루미는 미마의 방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이다. 밤마다 반복되는 뉴스는 생방송이 아니라 재방송 혹은 녹음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인터넷 사용법을 전혀 모르는 미마와 상반되게 루미는 컴퓨터를 설치하고 ‘미마의 방’에 들어가는 법까지 알려줄 정도로 전자기기를 잘 다룰 줄 알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또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조금씩 다른 일과에서 전날과 그대로 진행되는 사건이 루미와 차를 마시는 장면이다. 루미는 계속 같은 디저트를 준비하고 같은 옷, 화장으로 미마의 집을 방문하며 미마에게 혼란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마는 자신이 자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미마가 자는 사이 루미는 충분히 옷장 안에 살해 당시 입었던 옷을 넣어 둘 수 있었다.


아까 '미마의 방'에 나왔던 종이 가방이 미마의 옷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 안에 피 묻은 옷이 있다.


  그 외에도 루미가 웹사이트 ‘미마의 방’에 미마의 일과, 자세한 습관, 숨기고 싶은 본심까지 다 작성하고 사진을 남겨둠으로써 미마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의심을 가게 만들고 ‘미마의 방’ 속 내용이 모두 실제라고 여기게 만든다.

 감독도 사건 배열과 영화적 장치를 통해 관객들이 미마가 스스로를 의심해가는 과정과 일치하게 미마를 의심하게 만든다. 자극적인 살해 장면을 넣고 드라마 장면을 마치 실제처럼 표현하여 실제 사건 사이에 환상이나 허구를 표현한 쇼트를 늘려감으로 이전의 사건들을 잊게 한다.

 미마가 일어나자마자 손을 보는 것도 사진작가의 살해 장면과 ‘미마의 방’을 보는 장면을 빼고 본다면 미마가 루미와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깨뜨려 손이 다친 장면을 연결해 자신의 다친 손을 확인한다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감독은 기억의 연속성에 의존해서 자기 동일성이라는 환상을 만드는 거지.”라는 미마가 찍고 있는 드라마의 대사를 그대로 이용해 장면의 연속성으로 관객들이 미마를 루미와 동일한 인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미마가 괴물일 것을 의심하고 있는 사이 미마의 사생팬 미마니아가 등장하고 모든 살인 사건이 자신과 연관돼있음을 알린다. 미마니아는 순결을 잃지 않은 ‘진짜 미마’ 자신에게 가짜 미마를 처단하라는 메일을 보낸다는 정보를 남기고 미마를 성폭행하려다 미마의 손에 죽는다. 혼란스러운 미마를 다독이는 듯 나타나는 루미는 미마를 ‘미마의 방’을 데려가고 ‘미마의 방’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알리는 반전을 보여준다.

   관객이 생각한 괴물은 사실 미마가 아니라 루미였다. 루미는 미마를 동경하다 못해 스스로를 미마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돌 미마로 존재하기 위해 미마니아를 이용하여 미마를 염탐하고 미마와 미마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 (피해는 살해까지 이른다.)



애매한 여성 괴물 – 미마와 루미의 괴물성

  우린 미마에게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들은 미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미마의 “나는 진짜야.”라는 마지막 대사로 미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끝까지 관객들은 갑론을박의 장을 펼친다. 유일하게 미마의 본심을 파악하고 공감하며 동일시하는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루미’다.

  미마가 루미의 환상인 ‘미마의 방’에 빠져나올 수 없었던 것도 미마의 본심이 그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마가 강간 장면을 찍던 상황에 루미는 그 장면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가버리는 인물이다. 루미는 미마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미마의 어두운 내면을 실체화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루미의 존재는 미마 안에 충분히 괴물성이 내재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사회적 의식을 가진 미마는 늘 순종적이고 밝은 모습이다. 그런 미마가 점점 괴물화되는 것을 보며 관객들이 위협감을 느낄 찰나 루미의 등장은 미마 안의 괴물을 떼어내 안심시킨다. 그러나 미마는 자신을 죽이려던 루미가 교통사고가 당하려 하자 그를 살려낸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 루미를 방문하기도 한다.

 미마가 루미를 살려낸 것은 미마의 본심, 미마의 어두운 내면을 버리지 않고 미마가 가진 괴물성은 가라앉아 있을 뿐 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내가 진짜 미마다.’라며 웃는 미마의 모습을 보며 당황해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오히려 실체화된 악이 사라지면서 선과 악의 분리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미마의 부자연스러운 미소는 진정한 주체적인 괴물이 탄생한다는 불안감을 만든다. 그러나 바바라 크리드가 이야기하는 괴물화의 결과에 비해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괴물성은 그 역할과 의미에 아쉬움이 있다.


 루미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거나 침범하는 무법자였다. 여성을 성적으로 보는 폭력적인 남성들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강한 힘과 폭력성을 지녔음에도 그의 괴물성은 영화 후반부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루미는 남성 중심의 담론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열등감에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로 그치고 만다. 그가 부각되지 못한 이유는 그는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루미의 공격성은 다수에게 향해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인공인 여성, 미마에게 향해 있다. 여성 괴물이 된 이유는 그가 순결성을 잃은 미마를 원치 않아서 즉, 여성 숭배의 이미지를 박탈당하고 싶지 않아서다. 루미의 괴물성은 기존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거나 남성과 여성,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목적보다 남성을 위협하지 않은 여성성을 고착화시키려는 목적에서 발생했다.  

 여성이 여성을  말 그대로 ‘아이돌(idol)’로서, 순결을 지키고 숭배되는 우상으로서 존재하길 바라는 시각을 가진 이상한 상황이다.  루미의 욕망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성의 신체를 물건으로 보는 남성의 욕망에 가깝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여성을 향한 폭력적이고 왜곡된 섹슈얼리티적인 남성들의 시각이 나타난다. 영화 내부에 존재하는 시선들이 미마를 공포와 고통 속에 밀어 넣고 관객들은 그 고통마저 지켜본다. 하지만 결국 미마를 근본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던 건 동일성 인격장애(다중 인격)에 걸린 한 여성이라고 귀결하면서 그동안 폭력적으로 바라본 남성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보았던(남성 중심 시각으로 관음 하던) 관객들의 부담을 씻겨 낸다.

 루미의 괴물성은 표면적으로 살해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전반을 놓고 관객에게 끼치는 영향으로 볼 때 남성들의 폭력적인 시각을 무마하는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만들어진 소모적인 장치로 해석 가능하다. 즉 괴물 여성이었던 루미의 캐릭터도 결국에는 남성 관객들을 위한 소모적인 대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 제작자들은 처음부터 관객을 남성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퍼펙트 블루> 속 여성 괴물에게서는 남성에게 주는 ‘거세하는 자’로서 공포,  재생산성, 생리적인 현상이라는 여성의 신체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공포는 밝혀지지 않는다. 공포라는 감정만 이용된 채 여성을 타자화하여 성적 사물 혹은 그들의 행동과 신체를 스펙터클로 여기는 동시에 혐오를 담은 시선이 이어진다.

   두 여성 캐릭터의 괴물화는 흥미롭게도 기존의 이분법적인 구도가 약간씩 뒤틀려 있다. 미마는 선인이지만 순결을 잃은 ‘창녀’에 속한다. 루미는 악인이나 미마의 순결을 지키고자 하는 자이다. 두 사람에게는 모두 약점이 존재하며 이 약점은 남성들의 우위에 올라갈 수 없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갈등은 순결이 더럽혀진 창녀와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정신장애를 앓는 소위 미친 여자의 쫓고 쫓기는 액션 스펙터클이 되고 관객들은 그들을 먼발치에서 스릴 있게 지켜보면 된다.

 미마는 주인공이었지만, 주체는 아니었다. 주체인 관객은 미마와 동일시할 수 없다. 미마는 영원한 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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