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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를 만드는 사람

by 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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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사랑한다.


사랑함을 단언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도 유별히.


이따금 내 몸을 모두 던져 외부의 시적인 것을 감지해야만 언어로 바꿀 용기가 생기는데,

그 용기가 시를 가구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애정으로 이어졌을 때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생경하다.

한해동안 내가 내린 대부분의 선택과 움직임들은 나의 결로 정돈된 작업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에 있었고,

그렇기에 작업 하는 내내 마냥 설렜던 것 같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존재를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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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를 스케치하기 전부터 촬영 컨셉과 구도, 구조적 아이디어가 떠오를만큼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확고한 시였다.


애정하는 모든 것들에게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

내가 가진 가장 순수하고 고운 마음만 꾹꾹 눌러 담아 썼으니 더할 나위 없었던 것 같다. 가구의 쓰임은

꾸준히 곁에 두기도 하고, 시의 생명성을 은유하기도 하는 '꽃'을 꽂을 수 있는 테이블로 정했다.



1423FF61-45DA-4216-9F76-B724BA7615C3.jpg 시의 시각적 비례 탐구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들을 가구의 형태적 프로세스로 갖고 오자.


시를 쓰면서 고려했던 행의 배열과 어미의 반복이 주는 은율이 가구에도 온전히 드러나길 바랐기에

구조적 고민을 먼저 시작했다. 누군가를 향한 오롯한 마음이 모두를 은유함을 가구로 어떻게 드러낼까.

언어로도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가구로 해석해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숱하게 생각하고 또 고민함과 동시에 그 생각이 뭍으로 빠지지 않게 조심했다.

메시지는 직관적이길 바랐으니까.


내가 꽃을 사랑함을 깨달은 것은

물도 잘 안마시는 내가 꾸준히 꽃에 물을 주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꽃에 물을 준다는 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꽃의 안위를 살피며 물을 주고 돌보는 마음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면,

감상자의 행위로 하여금 '사랑'스러움, 시스러움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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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스케치 (불필요한 형태가 많이 보인다)



한송이에 물을 주는 행위를 통해 꽃이 가구 전체에 번지는 이미지를 그리며 컨셉을 구상했고,

도르래라는 부품을 활용해 동적인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도르래는 무게차에 의한 위치 변화를 만드는 정말 매력적인 파츠인데,

감상자의 행위가 가구 자체의 극적인 변화로 이어지게 하고 싶었기에 이 점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IMG_0603.jpg 도르래도르방


그치만 생각보다 시중에 있는 도르래는 투박하고 둔하게 생긴 녀석들 뿐..

해외배송도 해보고, 을지로 1가부터 5가까지 나돌며

형태적으로 유려하고 사이즈도 적절한 도르래를 찾기까지 수차례 실패했던 것 같다.





여러 발주 끝에 업체를 정하고 형태 수정에 들어갔다.

사장님께서 도르래 구조를 들으시고는 안된다고 고개를 저으셨지만 끈질기게 묻고 설득하며

대안을 찾아갔다.


화병과 추의 역할을 하는 철판의 무게를 동일하게 맞춰야 하고,

중앙에 화병이 정확하게 위치해야 했으며,

와이어의 길이에 소수점의 오차라도 생기면 화병이 기울어지기에 수치 계산과 중심 설정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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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모델링



실제 작업에 앞서 수정한 최종 스케치이다.

먼저 다리를 파이프에서 마룹으로 바꿨다. 지름을 최대한 작게 유지하면서 상판을 지탱할 수 있도록.


그리고 꽃의 집중도를 고려해 원형으로 변경한 후,

다리 개수를 줄이기 위해 그들 간의 중심 위치를 찾는 실험을 했다.

또 상판에 구멍을 내어 화병이 움직일 때 흔들리지 않도록 그 사이를 관통하게 함.


+ 사장님 뵐 때마다 늘어나는 도면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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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라도 오차가 날까 후덜덜 떨면서 작업실에 콕 박혀 작업했다.

오차를 발견하면 바로 도면 수정하면서.


IMG_2986.jpg 얘야 일어나야지


수직 수평이 딱 맞아야 구조적 미가 사는 형태였기에

세우고 뒤집고 세우고 뒤집고를 반복하면서 체크했다.


IMG_3206.jpg 아버지의 용돈



사장님께서 택시타고 가라고 이만원을 손에 쥐어주셨다..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을지로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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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님 철가루임


물론 나의 귀여운 실수로 유리 재단하러 왕복했지만.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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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하면서 가구를 담아내기에 영상이라는 매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함께 작업하고 싶은 사람이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진행했다.


민해는 한예종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친구이자

본인의 감성을 유형화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동료이다.

무엇보다 민해의 감성과 감각이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할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오랜만에 고교시절 얘기도 하고 작업 아이디어도 나누며 이후에도 몇번의 회의가 오갔다. 정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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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오브제 제작


원하는 꽃을 찾기 위해 민해의 도움을 얻어 꽃시장에 갔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봤을 때 그 실루엣이 흥미로운 꽃을 좋아하는데

보기만 해도 매력적인 시각물들이 한가득이었다.


오브제 작업도 해보면서 민해랑 촬영 컨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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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테이블 장만한 여성이 되어 스튜디오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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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상판에 반사되어 번지는 장면/구도를 찾기 위해 컷마다 피드백을 주고 받고 주고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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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381.jpg 더할 나위가 없다.


ALL BUT ONE (2022)


_Stainless steel, Glass


시를 읽고 필사하기를 애정하는 작자(나)의 취미에서 비롯되어,

자작시 <모두인 동시에 하나를>이 작업으로 이어진 작품이다.

시를 가구로, 공간으로 향유할 수 있다면 충분토록 완전한 시적

일상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어떤 형태의 어미로 끝맺을지,

어떤 비례로 행을 나누고 어느 위치에서 수식할지,

시를 이루는 글자들의 몸짓에 따라 무한한 의미를 함축하게 되는

시의 가능성을 가구의 형태로 전환한다.


PT01은 도르래(pulley)의 원리에 착안하여 감상자가 꽃에

물을 주는 행위로 하여금 물을 머금은 꽃의 무게/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꽃이 테이블 전체에 물드는, 한송이를 향한 오롯한 애정이 시적 일상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선물한다.




반갑다.

몇번이고 초면처럼 반갑게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

해가 지나기 전에 나의 결로 정돈된 가구를 만나

충분토록 행복했다.



올해 모든 움직임들이 이를 위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설렜다.



모두 하루하루 설레는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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