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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4 '냉털 리조또'는 초면입니다만.

by 왕은지


제주에 온 지 두달이 지났다. 캘린더를 열어 어느 날을 가르켜도 그날의 장면을 마침표 없이 묘사할 수 있을 만큼 실체가 있는 시간이었다.


기념일의 어원이 궁금할 정도로 매일을 기념하고 싶었다. 그 중 단골카페를 가기 위한 오르막 3번 내리막 3번의 자전거 코스는 두달 통틀어 으뜸인 시간이었는데, 이 코스의 오르막은 오르막답지 않게 미운 구석이 없었다. 언덕의 굴곡 덕에 바다 하나를 두고 고개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스케치업 웨어하우스에서 바다를 불러와 마우스로 각도 조정하듯) 볼 수 있음에 종아리 하나쯤은 며칠 뭉쳐도 상관 없었달까. 언제는 한번 친구가 놀러와서 이 오르막을 어떻게 매일 오갔는지 물었는데, 그때야 '아 이거 오르막이었구나' 싶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 오가는 계획과 우연 사이의 양보 없는 실랑이가 좋다.

나는 매번 계획의 편에 서지만 우연이 우세한 싸움에서 예상치 못한 희열감을 느낄 때면, 언제나 이 둘의 중개자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의 생활에서도 동일한 현장감을 느낀다. 가구를 만드는 감각과 사람을 대하는 감각은 결코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두 감각은 모두 '보다'를 기반으로 하는데, 무언가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망막에 상이 맺혀 인식하는 것을 넘어 나의 일부를 그 대상에 가져가 맞대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말로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나의 감각이 대상에게로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부단히 사람을 보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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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직전인 채소들을 풍기 크림으로 에둘러 볶은 냉털 리조또.

치고는 맛이 상당하다. 뭔가 아쉬워 그라나도 치즈를 뿌리고 토치로 그을렸더니 나름 불맛도 난다.

죽처럼 묽고 꾸덕한 식감을 좋아하는 나는 리조또가 소울 푸드이기도 한데, 할머니가 되어도 이 식성이 변치 않는다면 틀니는 필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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