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하지 못하는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과 같다
2000년, 컬럼비아 대학교의 심리학자 시나 아이엔가는 캘리포니아의 한 고급 식료품점에서 잼 시식대를 차렸다. 하루는 시식대에 6종의 잼을 진열하고, 또 하루는 24종의 잼을 진열하여 어떤 날 잼 판매량이 높을지 관찰하는 실험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6종의 잼을 본 손님들 중에서는 30%가 구매까지 이어졌지만, 24종의 잼을 본 손님 중에서는 고작 3%만이 지갑을 열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좋은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에 이르지 못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잼 실험이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선택 과부하라고 부른다. 2004년, 배리 슈워츠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택의 역설'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만족도는 떨어지고 후회는 커지며, 심한 경우 결정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2000년에는 24종의 잼이 문제였지만, 2026년 지금의 AI는 우리 앞에 2만 4천 종의 잼을 늘어놓고 있다.
이번 학기에 나는 NotebookLM을 활용해 직접 쓴 교재의 내용을 통째로 AI에 학습시키고 강의 자료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교재 PDF를 업로드하면 AI가 내용을 분석하여 슬라이드를 구성해주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한글로 제작했는데 꽤 괜찮은 결과가 나왔다. 그러던 중 수강생 중에 외국인 학생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강의 자료를 다시 영어 버전으로 만들었다. 다시 영어로 생성해보니 한글 버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영어권 특유의 감성이 담긴 슬라이드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호기심이 발동했다. 교재의 챕터를 하나만 넣을 때와 두세 개를 묶어서 넣을 때의 차이, 프롬프트를 설명 위주로 요청할 때와 그림 위주로 구성해달라고 할 때의 차이가 궁금해졌다. 계속해서 조합을 바꿔가며 실행해 보았다. 매번 나오는 결과물이 저마다의 매력을 지니고 있어 도저히 자료 생성을 멈출 수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전체 구성은 A 버전이 낫고, 4페이지에서 7페이지 사이의 설명은 B 버전이 더 좋으며, 도입부는 C 버전이 끌리는 식이었다. 각각의 자료가 내용은 같지만 느낌과 구성이 조금씩 달랐고,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우월하기보다 저마다 부분적인 장점이 달랐다. 결국 나는 A의 전체 뼈대에 B의 중반부를 이식하고 C의 도입부를 붙여서 일종의 합성 버전을 만들어냈다.
돌이켜보면 나는 AI가 제시한 선택지 앞에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변수를 늘리고 조합을 만들어내며 비교 대상을 증식시켰던 것이다. 어찌 보면 AI가 주는 무한한 결과물 앞에서 계속해서 더 좋은 버전을 내놓으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AI는 한 번도 이쯤이면 됐습니다라고 말해주지 않았고, 요청할 때마다 성실하게 새 버전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 끝없는 성실함이 오히려 덫이었다. 정신없이 몰두하다 보니 연구실 시계는 어느덧 밤 1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다. 논문을 완성한 뒤 AI에게 검토를 맡겼는데, 초기에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다. 전체 구조에서 논리적 허점이 있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었고, 그 피드백을 반영하니 논문의 완성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그런데 굵직한 문제들을 다 해결하고 나니 AI가 점점 더 세부적인 지점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문장의 톤이 어떻다느니, 이 단어보다 저 단어가 낫다느니, 수동태를 능동태로 바꾸라는 식의 조언들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수용할 만했다. 진짜 문제는 그 수정들이 서로 꼬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AI가 이 표현은 너무 직접적이니 좀 더 부드럽게 바꾸라고 해서 고쳤더니, 몇 라운드 뒤에 같은 AI가 여기는 표현이 너무 두루뭉술하니 더 명확하게 쓰라고 지적해 왔다. 부드럽게 고치면 모호하다고 하고, 명확하게 고치면 너무 직설적이라고 한다. 빠져나올 수 없는 무한 루프에 갇힌 것이다.
그 루프를 도는 동안 논문의 버전은 계속 올라갔다. 나중에 복기해보니 Ver. 08 정도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이미 Ver. 14까지 와버린 다음이었다. 14번째 버전은 8번째보다 분명 더 많이 손을 댄 흔적이 역력했지만, 결코 더 좋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장들이 과하게 다듬어지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날카로운 통찰이 사라져 있었다. 칼을 너무 오래 갈아서 날이 둥글게 마모된 셈이다. 결국 나는 대화창을 한참 위로 스크롤하며 Ver. 08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더듬어 찾아야 했다.
이 두 경험을 통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AI는 그만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은 버전을 달라고 하면 끝없이 만들어주고, 더 고쳐달라고 하면 무한히 수정해주지만, 더 나은 것과 충분히 좋은 것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 경계를 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이를 정하지 못하면 개선이 어느 순간 개악으로 뒤집히는 지점을 자기도 모르게 지나쳐버린다.
이건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메일 문구를 다듬어달라고 하면 다섯 가지 톤이 나오고, 기획안의 방향을 물으면 열 가지 전략이 제시되며, 연구 아이디어를 상의하면 스무 개의 가설이 나열된다. 하나하나가 그럴듯하고 나름의 논거가 있기에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AI 이전의 세상에서는 선택지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선택지의 수가 조절되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의 범위 안에서 떠올릴 수 있는 옵션은 한정적이었고, 그 안에서 고르면 그만이었다. 일종의 자연적 필터가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AI는 그 필터를 통째로 걷어내 버렸다. 이제는 프롬프트 한 줄이면 수십 개의 옵션이 쏟아져 나오는데, 각각이 제법 그럴듯한 논리를 갖추고 있어 비교하고 판단해야 하는 부담이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온다.
심리학에는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의 의사결정 능력은 무한하지 않아서, 하루 동안 내리는 결정의 수가 늘어날수록 결정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침에는 꼼꼼히 따져보던 사람이 저녁 무렵이면 아무거나 괜찮아를 외치게 되는 현상은 누구나 겪어봤을 것이다. 이것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뇌가 의사결정에 쓸 수 있는 에너지 자체가 유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 이스라엘 교도소의 가석방 심사위원회를 분석했더니, 오전에 심리를 받은 수감자의 가석방 승인율은 약 65%인 반면, 오후 늦게 심리를 받은 이들의 승인율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점심 식사 후 잠시 회복되었다가 다시 떨어지는 패턴을 보였는데, 이는 수감자의 죄질이나 행실과는 무관했다. 심사위원들이 결정을 많이 내릴수록 새로운 판단을 내리기보다 현 상태를 유지하는 쪽, 즉 가석방을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AI 시대에 대입해보면 꽤 심각해진다. 예전에는 직장에서 하루에 내리는 결정이 보고서 구성이나 회의 안건 순서 등 몇 가지에 불과했고, 선택지 역시 두세 개 수준이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지 않았다. 하지만 AI가 매 순간 수십 개의 옵션을 제시하는 환경에서는 결정의 횟수와 강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다. 이메일 하나를 쓸 때도 다섯 버전 중 하나를 골라야 하고, 보고서 구조를 잡을 때마다 열 가지 구조를 비교해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결정들이 하루 종일 쌓이면 뇌는 버텨내지 못한다.
AI가 인간의 생산 부담을 줄여준 것은 맞지만, 그 빈자리를 결정 부담이 채워버린 셈이다. 나는 이를 '최적화의 유혹'이라고 부르고 싶다. AI가 열 가지 옵션을 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중 최선을 찾으려 한다. 이미 충분히 괜찮은 결과물이 있음에도 혹시 한 번 더 돌리면 더 나은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열한 번째 결과물을 요청하게 된다. AI는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스무 번째, 서른 번째 버전을 내놓는다. 하지만 각각의 미세한 장단점을 비교하느라 멈출 타이밍을 잡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앞서 언급한 배리 슈워츠는 인간을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 자기 기준에 맞는 선택지를 만나면 곧바로 결정하는 만족자(Satisficer)와, 가능한 모든 선택지를 비교해 객관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찾으려는 극대화자(Maximizer)다. 흥미로운 점은 극대화자가 실제로 더 좋은 조건을 얻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도는 오히려 더 낮고 후회와 우울감을 느끼는 빈도가 높았다는 연구 결과다. 더 좋은 것을 골랐는데 더 불행해지는 역설이다.
문제는 AI가 모든 인간을 극대화자로 몰아넣는다는 점이다. 선택지가 적던 시절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판단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AI가 더 나은 버전을 만들어줄까요?라고 묻는 순간, 그 제안을 거절하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더 나은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서 멈추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지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개인을 넘어 조직 전체로 확산된다. 회의실 풍경도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누군가 기획안 하나를 가져오면 이 방향으로 갈까 말까를 논의했다. 찬반과 수정이라는 명확한 축을 중심으로 논의가 수렴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담당자가 AI로 뽑아낸 열 개의 기획안을 들고 온다. 각각 다른 타깃과 논리를 가진 안들이 나열되면 논의의 초점은 흐려지고 합의는 어려워진다. 결국 몇 개 더 만들어보고 다음 주에 다시 보자는 결론으로 끝맺기 일쑤다. 다음 주가 되면 안은 스무 개로 불어난다. AI가 생산의 병목은 뚫어주었지만 그 자리에 의사결정의 병목이 생긴 것이다. 프로젝트가 지연되는 이유가 만들 시간이 없어서에서 고를 수가 없어서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역설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기준을 먼저 정하는 것에 있다. 잼 실험으로 돌아가보자. 24종의 잼 앞에서 3%만 구매한 이유는 손님들에게 명확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맛을 원하는지 판단할 틀이 없는 상태에서 24종을 마주하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반면 나는 아침 토스트에 바를 새콤한 맛의 잼을 찾는다라는 기준만 있으면 240종이 있어도 대부분을 즉시 걸러낼 수 있다.
호모 에디토리스의 핵심 역량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선택지를 본 다음에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보기 전에 기준을 확정하는 것이다. 결과물을 보며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요청하기 전에 이번 작업의 핵심은 이것이고, 포기할 수 없는 요소는 이것이며, 분량은 여기까지다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래야 AI가 무엇을 내놓든 평가할 프레임이 생긴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NotebookLM 자료를 끝없이 만든 이유는 핵심 개념은 세 가지, 분량은 30페이지 이내라는 기준을 미리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논문 검토가 무한 루프에 빠진 것도 논리 구조만 본다, 문체는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선을 긋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준이 먼저 있었다면 첫 번째 버전이나 여덟 번째 버전에서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기준이 있으면 선택지가 많아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기준이 없으면 선택지가 단 세 개여도 방황하게 된다.
물론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기준은 결국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답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택지가 적어 상황이 기준을 대신 정해주기도 했다. 관행이나 지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방향을 정하는 것이 전적으로 내 몫이 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 조직이 제공하려는 가치가 무엇인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AI의 바다에서 표류하지 않는다. 결국 무한 선택지의 역설을 건너는 열쇠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 인식이다.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은 결정을 미루는 것도 하나의 결정이라는 사실이다. 완벽한 선택을 기다리는 동안 기회의 창은 닫히고 경쟁자는 움직인다. 실리콘밸리의 격언인 '빠르게 움직이고 부수어라'의 본질은 완벽을 기다리지 말라는 데 있다. 70퍼센트의 확신이 있을 때 결정하고 실행하며 조정해 나가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AI 시대에 100퍼센트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기 때문이다.
잼 실험의 교훈은 명료하다. 선택지가 많다고 좋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선택은 명확한 기준과 적시의 결단에서 나온다. 지능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옵션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찍을 수 있는 하나의 마침표다. 무한 선택지의 역설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문은, 결국 결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