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보다 더 강렬히 느껴진 것
13년간 키우던 고양이가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죽었다.
기존 장알러지와 감염증세로 올 2월부터 더 힘들어했고 3월 초부터 항생제 치료를 하던 노묘라 3월 말께의 이사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너무나 많은 '내가 ... 했더라면'에 해당하는 후회가 일기장 4장을 넘어서고 있다. 정확히 인재였다. 내 잘못.
그 간 만난 지인은 없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고양이가 죽은지. 내가 말을 안했으니까. 문제는 말할 데가 없었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아플 때부터 혼자 병원에 데리고 다니고, 이사 와서도 응급실에 엑소좀 치료까지 갔었지만 별 차도가 없이 이사 5일 만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혼자서 집에서 그 죽음을 지켜봤다.
생각보다 슬프진 않았다. 마치, 쏘시오 패스처럼 고양이가 죽자마자 5분도 안되어 장례 예약을 했고 지침대로 담요에 감싸 박스에 넣었다. 눈을 감겨주는 행위는 눈을 붙이는 것에 가까웠다.
다음날 장례식에도 혼자 택시 타고 갔다 왔다.
가는 도중 택시에서 구토를 했다.
내 고양이가 죽음 직전에 많이 보여준 것처럼.
그래 그게 맞지. 우린 한 팀이었으니까.
누구를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 가장 힘겨웠다. 정확히 말해 모르는 게 아니라 없는 거였다. 이 없다는 것의 현실감은 13년간 몸을 부비며 살아온 고양이가 떠난 슬픔보다 더 황당하고 강했다.
- 앞으로 고양이도 없이 살아야 함 (내게 다른 고양이는 없다)
- 이런 일(장례)조차 혼자 함 (난 친구도 없다)
- 말할 데도 없음 (가족도 허울뿐)
며칠 전, 이제는 잠깐씩 걷게 된 엄마와 큰언니와 밥을 먹었는데, 내 고양이가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에서만은 내 소리가 뮤트가 된 듯한 가족의 반응을 보고 말았다. 엄마는 자신의 고통만을 이야기하기 바빴고, 내 고양이에 대한 내 고통은 그들의 인식 저 너머에 있는, 어떤 너무 럭셔리하거나 마땅히 무시되어야 할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큰언니가 왜 입원했나고 물어봤는데, 그 때서야 내 울음보가 터졌다.
- 내 고통에 귀 기울이는 단 한 사람
그래, 엄마 아빠는 어쨌든 이기적이고 이젠 아프기까지 하다. 내가 이사를 하거나 고양이가 아파도 와서 도와주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의 부모 돌봄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싶다.
어쨌거나 작은 경제적 목표만을 위해 2년을 좁은 집에서 더 보내야 했던 내 고양이가 나의 최근 부모 돌봄 시기와 겹치면서 고양이와 나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던 듯하다. 때문에 나는 고양이의 변화에 더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했는데, 너무나 건강하던 고양이라 그렇게 허망하게 갈 줄 몰랐기도 했기 때문이다.
매일 보면서도 매일 충격적으로 예쁘던 홍키야.
너 때문에 이사했는데, 이사 때문에 죽었구나.
너의 죽음은 뜻이 뭐니.
난 어떻게 사니.
홍키야.
이사 당일만 해도 이렇게 괜찮았고 다음날 급격히 나빠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