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K 2024 시네클럽 : MIZOGUGHI NARUSE OZU
1.
오즈라는 감독님을 통해서 기존의 영화 문법들이라 불렸던 것들과 허우샤오시엔, 류스케, 고다르 감독님들을 경유해서 이들이 사용하는 카메라라는 것을 글로 써봤습니다. 사실 제가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즈라는 감독의 영화를 감상하고 내는 생각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오즈 감독님의 <오차즈케의 맛>을 보고 “뭐야 영화과 학생이 만들었나? 하하하!”라고 했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이러한 생각은 라는 영화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는데요,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의 영화에서 봤던 쇼트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았던 것은 카메라의 시선 자체가 관객에게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류스케 감독님의 인터뷰가 떠오릅니다.
“난 그동안 어떤 영화에서도 시점숏을 찍은 적이 없다. 카메라는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다. 카메라는 촬영 장치로서 기능할 뿐이다. ••• 영화가 진짜인 척하지 않고 외려 그것이 영 화임을 내세움으로써 관객과 더 잘 소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페셜 토크
2.
오즈의 영화하기에 제가 느낀 감상문을 쓰기에 앞서, “영화가 진짜인 척”이라고 말하는 영화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영화에서의 할리우드 문법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 사유를 기능으로 하는 착각에서 비롯된 쇼트들‘입니다. 영상 문법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쇼트라는 것이 기호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많은 영화의 쇼트들은 기능을 가지고 표현됩니다. 쇼트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가령 “인물이 인물을 보는데 이걸 사랑스럽게 표현하고 싶다.”라는 것이 쇼트 단위에서 기능이 수행하는 예시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 쇼트가 표현의 최소 단위’라는 정의가 류스케 감독님이 말하는 “영화가 진짜인 척”하는 영화들의 정의가 맞다면, 사물이 기능으로 기호화되고 의미작용으로 기능할 때 사물의 이데올로기가 생기듯이, 쇼트들이 표현의 기본단위가 되고 의미작용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작업을 수행한다고 생각합니다.
3.
그래서 저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님이 말한 카메라가 촬영 장치로 기능해야 하는 이유를 위의 이유들, 미국 영화에 대한 반발적 실천, 이라고 생각합니다. 류스케 감독님의 영화들을 보시면 쇼트 자체가 어떠한 사유 방식을 갖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 감독님이 샷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했던 오즈 야스지로라는 감독님도 반발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오즈라는 감독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에서 느꼈던 인상들이 필요했습니다.
4.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은 기본적으로 롱테이크의 영화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의 롱테이크를 설명하기 위해서 미국적인 롱테이크와의 차이를 두고 싶습니다. 오슨 웰스 감독님의 <악의 손길>은 롱테이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하지만, 저에게는 악의 손길의 롱테이크는 몽타쥬의 기능으로 롱테이크를 소화합니다. 쇼트가 ‘표현의 최소 단위’가 아닌 이유를 누군가 이 영화로 예시를 든다면 악의 손길이 여러 개의 클로즈업들로 표현되어 이루어진, 몽타쥬화된 롱테이크이기 때문입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의 롱테이크는 클로즈업을 이용해서 사물이나 인물을 기능화하지 않습니다. 클로즈업의 기능은 인물의 대사가 아닌 인물의 얼굴을 통해서 대상을 해석하려고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아닌 서로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시선을 통해서 남녀가 연애하게 된 계기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 영화는, 히치콕이 사용한 설명과 이유에 기대지 않고 클로즈업을 사용하여 행동의 원인을 정당화하는, 결과적으로 ‘클로즈업’이라는 표현의 기능으로 인해서 ‘인과관계’를 정당화하는 쇼트들의 이데올로기 작업은, 사물과 대상과 인물의 ‘클로즈업’ 없이는 설득될 수 없습니다. 미국이 범죄프로파일링 다큐멘터리와 <택시드라이버, <조커>라는 영화를 내놓을 수 있게 된 결과도 클로즈업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클로즈업된 영화들이 “진짜인 척하는”, 관객을 설득하는 영화라면,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의 카메라는 우리를 설득하려 들지 않습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의 롱테이크의 영화라는 것은 ‘클로즈업’ 없이 이루어지는 영화하기 작업이며,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특이하게도, 롱테이크의 영화가 아닌 편집의 영화로써, 오즈라는 감독님의 영향을 듬뿍 받은 영화하기 작업입니다.
5.
오즈라는 감독님의 영화는 이상한 특이점이 상당합니다. 제가 라는 영화를 보면서 생각이 든 것들은 “왜 인물의 클로즈업은 상대 배우가 아닌 카메라를 보고 연기하는가?”, “왜 각각의 싱글샷은 항상 상대방의 대화가 끝나서야 이루어지는가?”, “왜 의미 없는 동선들이 보여지는가?” 이 정도일 뿐입니다. 뭔가 오즈라는 감독님이 영화라는 매체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고다르 감독님의 작업들도 생각납니다. 오즈라는 감독님의 영화의 대상은 소시민에 대한 주제입니다.
저는 처음에 오즈라는 감독님의 주제와 카메라가 ‘이 인물이 보고 느끼는 것과 배우라는 것과 영화라는 것 모두,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않는다.’라는 가정으로 분석했습니다. 우리가 봐야 한다고, 사실 삐딱한 시선으로 소시민을 고발한다고요. <오차즈케의 맛>이라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결말과 오즈 감독님의 카메라의 시점 쇼트는, 흔히 말하는 POV샷은, 우리가 보통 영화에서 말하는 POV샷과는 다릅니다. 저는 오즈라는 감독의 POV샷은, 그리고 모든 쇼트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POV샷이라는 가정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렇다면 의미 없는 동선들은 이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으로, 또한 보이스 오버와 오버랩이 없는 것들도 영화를 ‘가치가 아닌 사실 ‘로 이해됩니다. 이것은 또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님이 실천하는 영화하기의 방식과 유사할 것입니다. 실존주의라는 방식을 실천하려 하는 서양의 유명한 코엔 형제와 마틴 맥도나 감독님들이 하마구치 류스케와 실천이 다른 이유는 영화라는 것을 영화 산업으로 어떻게 인지하고 이해하는지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마구치 류스케가 영화를 모더니즘적인 예술로써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영화라는 예술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는가?”
6.
대표적인 사람으로 고다르라는 감독님을 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다르 감독님은 편집의 영화로서 ‘할리우드 이데올로기’를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영화적인 실천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했지만. 모더니즘 예술을 상대의 신비를 고발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특징을 가진 예술로 이해한다면, 모더니즘 예술을 아주 계급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고다르라는 감독이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상부를 구조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하부의 권리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한다면, 카메라는 하부구조로 기능을 하기 위해 예술의 실천은 정치와 아주 인접하게 기능합니다. 이는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한 이해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의 영화하기도 근본적으로 카메라를 기술 장치로 이해하려고 노력을 한 결과, 비정성시에서 카페 뤼미에르로, 카메라를 기술 장치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미국이라는 거대 상업의 문화적 서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일상의 서사를 선택하는, 혹은 인간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서사가 아닌 자연의 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로써, 예시로 홍상수가 실존주의의 방식을 김민희라는 실천으로 가듯이, 오즈라는 감독님도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라는 실천을 이행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사람들의 모범이 된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 오즈라는 감독님을, 고다르라는 감독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영화로 정치하기’라고 이해하기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7.
사실 고다르라는 감독을 저는 그렇게만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오즈라는 감독님에 대해서 다르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오즈 감독님에 또 다른 가정은 ‘소시민에 대한 주제를 사랑하며 이들에게 진정으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론’으로 차용한 카메라입니다. 오즈라는 감독님의 카메라를 첫 번째 가정은 “영화가 진짜인 척하지 않고 외려 그것이 영화임을 내세움”이 류스케 감독님의 카메라라면, 두 번째 가정은 “그것이 영화임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가 오즈라는 감독님의 카메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두 번째 가정 때문에, 하마구치 류스케와 오즈 야스지로라는 감독님은 한 편에서는 반대편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정은 <꽁치가 먹고싶습니다> 라는 오즈 감독님의 저서의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체로 오버랩이라든지 페이드인, 페이드아웃 이라는 것은 영화의 문법도 뭣도 아닌 거야. 그건 카메라의 속성인 거야.”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p.152
8.
이 오즈라는 감독님은 오버랩, 페이드인, 페이드아웃이라는 것을 기술적인 것, 카메라의 속성인 것으로 치부하는 동시에, 카메라의 속성이라는 것을 모두 제거하고 영화하기를 실천합니다. 기존의 오버랩, 페이드인, 페이드아웃이라는 것을 영화적 문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카메라의 속성으로써 이해하고 제거했다면, 기존의 영화적 문법들이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강력한 동기였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의해 변형되었던 소시민의 삶을 회복하려는 시도로써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에서 이상하게 느껴졌던, 아주 남성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되었다고 느껴졌던 결말은, 사실 그것이 소시민들의 문화적 관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아이러니로써 작용했던 것이 아니며, 일본의 문화적 특성을 존중하려는 결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미 없는 동선들은 이들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또한 보이스 오버와 오버랩이 없는 것들도 영화를 ‘가치가 아닌 사실로써 실천하기‘로 이해됩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POV샷은 배우와 인물을 거리 두며 가짜임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소시민을 연기하는 배우로 대하는 것이 아닌, 배우를 통한 소시민으로서 진실로 소통하기 위함이며. 인물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감정을 통해서 인물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닌, 표현을 제거함으로써 기존의 인물이라는 것이 마땅히 보여야 할 것이 아닌, 인물을 존중하려는 의미에서 인물을 만들려는 감독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9.
"세상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라도 모두들 달라붙어서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복잡해 보여도 인생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의외로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이것을 노린 것이 이번 작품입니다. 그것 하고, 이건 전부터 생각해서 조금씩 하고 있던 것인데, 하나의 드라마를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죠. 울든지 웃든지, 그렇게 하면 슬픈 기쁜 기분을 관객에게 전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설명일 뿐이지, 아무리 감정에 호소해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풍격은 표현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극적인 것을 전부 제거해서 울리지 않고 슬픔의 풍격을 나타낸다, 극적인 기복을 그리지 않고 인생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연출을 전면적으로 해봤습니다. 시절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어려운 방법이라서요. 이번에도 어지간한 정도로는 완성했지만 완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네요."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가을햇살, p.168
사실 오즈라는 감독님을 류스케를 통해서 설명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부초>라는 영화를 보면서 확신하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롱테이크의 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것과 사실은 편집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카메라에 어떠한 감정 따위를 넣지 않으려고 하는 시도들, 사실 오즈라는 감독님이 추구했던 영화미학이 아닌가요. 의미 없는 동선은 그저 “실존을 위한 차이와 반복” 따위로 불릴 수 있지만, 류스케 감독님이 그런 식으로 영화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 카사베츠 감독님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허우샤오시엔을 통한 오즈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10. 후기
’오즈를 통한 사유’에 대한 수기 영화와 철학 그리고 예술 이론이라는 것을 경유하는 글을 항상 써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독자를 고려해서 쓰는 글은 저에게는 미숙하다고 느껴집니다. 글에서 미적인 걸 추구하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사실 제가 언급한 분들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창피한 수준입니다. 그분들의 영화를 한두 편 보고 무슨 글을 쓴다는 겁니까.. 전문적으로 무언가 하기에는 제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람인 것도 저에게는 아쉬울 따름입니다. 최대한 독자를 고려해서 도움이 될 만한 글로 써보려고 시도했지만, 폐기된 것이 한두 개가 아니네요. 분석과 관련해서도, 형식과 관련해서도 글쓰기 능력의 부족으로 어쩔 수 없지만, 그저 시네클럽에서 봤던 오즈라는 감독님을 분석하기 위한 저의 사유 방식들을 써봤습니다. 그래도 노력했습니다. 이번 INK시네클럽도 무사히 마치며, 저의 성찰 가득한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