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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uff Sep 20. 2024

신데렐라 플룻의 작동

천재 작가는 내용을 형식으로 완성시킨다. 그렇다고 사건을 다루는 것에 능하다는 전제만으로 부족하다. 왜냐하면 신데렐라는 사건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심리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분법에서 개인 창작자는 본인의 표현을 표현하기 위해서 창작한다. 어리숙한 창작자는 자신의 개인 창조물을 자신의 언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언어 속에서 창조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의 본연 특성상 자신의 표현은 작품의 총체에서 나온다. 아무리 어리숙하다고 할지라도.

이 속에서 창조라는 것은 특히 본인의 경험에 의지하는 창작자는 창작자 본인의 말이 아닌, 선조 예술가의 언어 속에서 활동한다. 예시로 사과라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그 여러 개 사과 중에 자신이 현실에서 본 사과가 있는가? 아주 독창적인 시선을 가진 천재만이, 본인의 사과를 묘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사과를 보는가? 우리가 본 사과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 머릿속에 박힌 사과는 대체 누가 한 걸까?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형식이 되는 순간이다. 신데렐라는 아침드라마에서 형식으로 작동한다. 신데렐라의 구조 속에 갇힌 신데렐라의 심리기제는 우리로 하여금, "착한 신데렐라는 언젠가 못된 계모에게서 벗어나, 아주 행복한 결말을 이룰 것이야."라고 환상에 갇히게 만든다. 이것이 신데렐라가 만들어낸 비극의 환상이다. 선대 예술가는 신데렐라라는 동화를 창조한 것이 아닌, 우리에게 인식과 결핍을 생산했다. 아침드라마는 그 환상을 증명한다. 다만, 그 카타르시즘이 독자로 하여금 받아들이기 힘들 경우.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본인의 성실된 행동을 믿기에, 신데렐라 플룻은 감옥에서 헬스 하며, 찐따는 복싱을 하며, 뻐드렁니를 제거한 존예녀가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웹툰에서는 비루한 고자 남주가 쿨한 척을 하면 존예녀가 사랑에 빠진다. 여주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차은우와 서강준이 가만 두지 않는다. 쿨하고 존나 쌔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긍정하지 못한 채로 잘생기거나 예쁜 누군가가 사랑해 주고, 그다음에야 쌔지거나. 개찐따 플룻은 이렇게 생성된다. 어떤 천재가 이런 형식을 유행으로 창조한 지는 모르겠지만, 이분화된 한국 사회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아니면 왕가위나 로메르를 물고 빨거나.


고도로 발달된 내용은 형식과 구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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