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술이 기능으로부터 독립된 이후, 필자가 생각하기에 예술은 표현의 문제에서 독립되는데 이것은 심지어 총체의 측면에서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르네상스는 예술이 권력에 복종한다는 뜻이고, 자연을 포획하기 위한 19세기말에 예술은 다시 자신의 지위를 회복한다. 예술의 테크닉은 이미 다빈치에서 완결되었다. 예술을 권력에 복종하기 위한 쓸모없는 테크닉들. 기능은 계급에 예속되고, 그곳에서 예술의 숭고함은 예술이 목적으로 했던 아름다움은 단 하나의 레이어를 목적으로 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식적 실험들은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시뮬라르크가 돼버린, 어쩌면 사실 모든 것이 광고와 상품과 정보와 물건이 구분되지 않는 지금 이 시대에. 모든 상품과 광고가 아름답지 않냐고 묻는 것을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소비하려는 이 시대에. 아름다움은 다의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닌, 단 하나의 음절을 갖게 되었다.
인간이 종교에 복종했을 때가 암흑기라고? 야코포 벨리니가 지금 우리에게 입증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다의성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표상되는가? 시라는 매체를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유도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이유와 비슷하다. 시는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갖는다.
이제 한국이라는 대륙에서 이 시대의 아름다움은 단 하나의 음절을 갖는다. 적어도 아름다움의 계급을 잃어버린 오늘날, 계급적 도식이 없어진 오늘날, 대중에겐 단 하나의 단 하나의 음절을 요구한다.
예술은 기능 없이 사유될 수 없고, 사유 없는 예술은 기능될 수 없다. 감각이라는 것은 그저 맥락이다. 예술에 의한 감각과 광고와 상품을 혼돈하지 말라. 오직 기능적인 예술만이 예술의 기능적, 정치적, 시대적 맥락과 함께한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절대 부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비를 단적으로 먹고살자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3.
팬덤 문화라는 것은 소녀시대와 뉴진스가 가진 시대적인 유행과는 맥락을 달리한다. PC주의는 맥락으로 소비한다. 그들에게 작품은 오직 같은 맥락 출신 만이 작품을 감상하게 한다.
소통은 긴밀히 내부적으로, 외부와는 단절시키는 자신의 아름다움.
클래식은 르네상스 이전에 탄생했고, 르네상스가 시작되자 죽어버렸다. 나는 바흐를 사랑하고 모차르트를 싫어한다. 다만 다르다. 다만 드뷔시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