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찬란한 유학생활이 펼쳐질 줄 알았다.

프랑스 이야기 3

by 홍유나

오자마자 코로나로 인해 멈춰버린 프랑스에서 나는 어떻게 버텼을까?


사실 밀려오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 시작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한국인도 거의 없는 그 작은 도시 속에서, 프랑스어도 못할 때인데 한 시간짜리 외출이라도 하려고 준비해서 문 앞에 서면 발걸음이 떼지 질 않았다. 큰 바위가 몸을 누르는 것 같았다. 겨우 나가도 하루에 몇 번은 인종차별을 당해야만 했다. 프랑스인 학생들이 아시아인을 보면 숨을 참고 지나가는 행동을 하는가 하면 길거리에서 마약 한 노숙자들이 "너희들은 코로나야"라고 망언을 하기도 했다. 그놈의 칭챙총은 기본이었고, 장 보러 슈퍼에 가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누구한테 털어놓을 곳도 없는 채로 고독하고 광야 같은 시간이 계속 됐다.


나는 이전까지만 해도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쉽게 위축이 들거나 흔들리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어느 순간부터 외출할 때면 모자를 눌러쓰고 나갔다. 멀리 외국인이 보이면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불안해서 눈동자를 굴리는 대인기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져 늘 활발한 활동의 삶을 살던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그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부분이라 전달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을 겨우 보내고 있는데 더 최악이었던 것은 도대체가 이 코로나 상황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뉴스에서는 우리나라 국민들을 데려오기 위해 코로나 확산이 심한 나라에는 한국 전세기를 띄웠다는 소식, 많은 해외 유학생들과 이민자들 그리고 관광객들이 모두 한국으로 겨우 귀국한다는 소식뿐이었다.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는 건지 아니면 잠시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 등 고민하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갔다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체류증 조건이 걸려서 문제가 될 수 있었고,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시간을 보냈는데 코로나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다. 사실 당시 상황이 위험했었고, 코로나도 언제 종식될지 모르니 국립학교 시험을 언제 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시험 여부의 정보도 알 수 없었는데 다 막혀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냥 버텨봐야겠다고 결정지었다. 프랑스까지 이어준 교수님께서도 전화가 오셔서 흥분을 하시며 돌아오라고 하시고 모두가 말렸지만 나는 왠지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느낌이 있었다. 내가 여기서 할게 분명히 있다는 어떤 직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다시 해보자.



유학생활을 도와주는 선생님께서 국립학교 시험이 9월로 미뤄졌으니 준비하면 될 것 같다고 얘기해 주셨다. 9월.. 나에게 아직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완전히 다른 몇 개월이었다. 하루하루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계획을 짰다.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을 하고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으로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챙겨 먹고 조금 쉬면 선생님이 과외하러 집으로 오신다. 한 시간 정도 과외를 하고 나서 선생님이 가시면 복습을 했다. 그다음 밖에서 조깅을 한다거나 집에서 운동을 했다. 그러다 보면 저녁 시간이었다. 저녁을 챙겨 먹고 조금 쉬다가 잠들기 직전까지 프랑스어 공부를 했다. 불이 나도록 했던 것 같다. 노트가 순식간에 바닥날 정도로 공부를 하고 프랑스어 단어 300개씩을 외웠다. 제일 중요한 건 학교 시험 준비인데 내가 살던 도시에는 한국처럼 연습할 수 있는 시설이 아예 없었다. 그게 정말 최악이었다. 밖에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집은 기숙사여서 안 그래도 조용한 동네 소음이 엄청날까 봐 못하고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창문을 다 닫고 복도 문 닫고 화장실 문 걸어 잠그고 에라 모르겠다 철판 깔고 화장실에서 노래 연습을 했다. 상상조차 못했지, 내가 노래도 마음껏 부르지 못하고 이 열악한 환경 속 화장실에서 절박하게 연습하게 될 거라고는..., 나는 이때부터 인생을 돌아봤다. 사람이 점점 겸손해졌다. 내가 이전까지 얼마나 감사한 삶을 살았었는지, 주어졌던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왔던 건지 정말 많은 것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감사함과 좌절이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내가 이런 삶을 살고 있을 동안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빠르게 돌아가는 시스템과 잘 갖춰진 시설들 덕분에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내 삶과 너무나도 상반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내 자리에서 할 것들을 묵묵히 했다.


조금만 버티자, 조금만 더 견디자.


그렇게 천천히 가던 몇 개월이 흘러 봉쇄가 풀리고 학교 시험을 치러 갔다. 대기자 명단을 확인하고 시험장 앞에서 대기하다가 이름이 불리면 들어가면 된다. 어찌어찌 준비했으니 다 하나님께 맡기자 하고 기도 하고 들어갔다. 뮤지컬 자유곡 1곡, 프랑스어 1곡.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의 <죽는 건 괜찮아>를 한국어로 불렀고, 축가로 불렀었던 레미제라블의 <On my own>을 불렀다. 심사위원들은 매우 집중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고 나는 준비한 대로 다 부르고 나서 질의응답을 짧게 하고 나왔다. 허무하게 끝났지만 후련했다. 이제야 나도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겠구나. 버틴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하며 속 시원한 마음으로 1차 관문을 끝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수업 시간표와 교실 정보가 적힌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두웠던 터널 끝에서, 마침내 밝은 빛을 마주한 듯했다. 이제야 꿈을 향해 한걸음 나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내 앞에 더 험난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