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시절, 나와 남편은 1년 반 동안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부지런히 오갔다. 자동차로 편도 50분 거리. 육지 사람들에겐 “그 정도면 옆 동네지!” 하겠지만, 제주 이주 9년 차인 지금의 나에게 그 거리는 거의 ‘국경을 넘는 수준’이 되었다.
입도 초창기만 해도 의욕이 넘쳤다. 주 3회는 서귀포 표선까지 40km를 거침없이 달렸다. 돌이켜보면 인천에서 서울 지하철을 타고 왕복 3시간을 출퇴근하던 ‘K-직장인’의 관성이 남아있던 덕분이다. 대학 시절엔 인천(집), 수원(학교), 강남(알바)이라는 거대한 트라이앵글을 하루에 찍던 나였으니까.
그랬던 내가 함덕살이 6년 차에 접어드니 심리적 마지노선이 ‘함덕’ 근처로 좁아졌다. 이제는 차로 20분 거리인 삼화지구만 넘어가도 “아이고, 시내 멀다!” 소리가 절로 나오고, 큰맘 먹고 시청 근처라도 다녀오는 날엔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온 듯 피곤함이 몰려온다. 제주의 느린 속도가 내 혈관까지 점령해 버린 모양이다.
연애 기간 중 가장 서운했던 점은 남편이 단 한 번도 나를 함덕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덕이 어떤 곳인가.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제주 최고의 명소다. 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성수기에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연애 중에 함덕 바다 한 번 같이 안 본 건 ‘파스타 한 번 안 먹어본 연애’보다 더 서운했다.
“아는 사람 만날까 봐 그래.”
그의 변명은 늘 똑같았다. 콧방귀가 나왔다. 함덕이 그래 봤자 행정구역상 ‘리(里)’인데,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만난다고? 만나면 가볍게 목례나 하면 되지 싶었다. 20년 가까이 서울과 부천에서 자취하며 배운 예절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가볍게 눈인사, 호수 확인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원치 않는 감정 소모나 간섭을 피하는 것이 도시의 매너이자 미덕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의 오판이었다. 남편은 ‘대장부’ 같은 시어머니의 귀에 혹시라도 설익은 소문이 들어갈까 봐 노심초사했던 거다. 마흔 넘은 노총각, 노처녀의 연애는 그렇게 비밀 첩보 작전처럼 함덕을 피해 표선 언저리를 맴돌았다.
결혼식을 치른 다음날은 일요일이었고 아침이 되어서야 비밀 연애의 봉인이 해제되었다. 친정아버지와 베프 친구 부부를 데리고 동네 해장국집을 찾았다. 지금은 건물을 지어 이전할 만큼 유명해졌지만, 당시엔 테이블 열 개도 안 되는 좁고 정겨운 주민들의 단골 식당이었다. 다섯 명이 좁은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는데, 문이 열릴 때마다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남편과 악수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누가 보면 남편이 식당 주인인 줄 알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얼굴도 모르는 어떤 분이 우리 테이블을 쓱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남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식사비를 내고 나가버리시는 게 아닌가.
“누구야? 아는 분이야?”
“응, 동네 형님.”
이후로도 이런 ‘기적’은 수시로 일어났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어느샌가 동네 형님들이 우리 밥값을 재빠르게 계산하고 사라지신다. 서너 테이블 건너 아는 분이 계시면 누가 계산했는지조차 모를 때도 허다하다. 남편 역시 후배들을 만나면 지갑을 먼저 열지만, 얻어먹는 횟수가 더 많은 걸 보면 함덕의 고령화 덕분에(?) 우리 나이가 여전히 ‘귀여운 막내’ 축에 속하기 때문이리라.
처음엔 당황스러웠던 그 과도한 관심이 이제는 참 따뜻하게 느껴진다. 도시의 식탁이 깔끔하고 정갈했다면, 함덕의 식탁은 ‘베지근하다(깊고 진한 맛이 있다)’. 단순히 국물 맛이 진해서가 아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이웃의 오지랖, 계산대 뒤에서 전해지는 이름 모를 형님들의 호의, 그리고 나를 ‘누구네 집 식구’로 받아들여 준 공동체의 온기가 국물보다 더 진하게 우러나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시내 나가는 피곤함을 뒤로하고 함덕의 단골 식당에 앉아 있다. 혹시 또 누가 내 밥값을 계산해주진 않을까 하는 발칙한 기대를 품으면서. 아니, 어쩌면 나도 이제 누군가의 밥값을 몰래 계산하며 “베지근한 정”을 나눠줄 준비가 된 ‘진짜 촌 아낙’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