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혀부터 현지화

by 몸냥필



요리는 못하지만 먹성이 좋고 식탐이 많다. 호기심은 왕성해서 새로운 음식에 곧잘 도전하지만, 호불호는 명확하다. 해조류, 해산물, 생선이라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는데, 마흔세 살까지 나의 ‘생선 세계관’은 회와 구이가 전부였고 그중 으뜸은 단연 광어회였다.



“섬에 사니까 매일이 회와 해산물로 파티하겠지!”



제주 이주를 결정했을 때 해산물과 생선을 실컷 먹을 생각을 품었다. 섬이니까 해산물은 지천으로 널려 있을 것이고 가격은 또 얼마나 저렴할까 하는 얄팍한 계산. 하지만 그것은 육지에서 미디어와 책으로만 제주를 배운 ‘관광객 마인드’가 낳은 무식이었다.


현실은 이랬다. 통계적으로 제주는 어업보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6배나 많다. 전국 평균보다도 농업 비중이 압도적이다. 내 주변만 봐도 배를 가진 사람보다는 펜션이나 과수원, 밭을 일구는 이들이 훨씬 흔하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제주의 경제와 생활을 지탱하는 뿌리는 흙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제주 사람들은 해산물보다 흑돼지를 더 사랑한다. 바다의 ‘좀녀(해녀)’보다 밭의 ‘왓녀(밭녀)’를 더 자주 마주친다. 심지어 굴 같은 조개류는 육지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느라 배송료가 붙어 더 비싸다. 살아있는 게는 구경조차 힘들고, 현지에서 잡히는 소라와 전복도 지인 찬스가 없다면 사 먹기에 꽤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다행히 나는 남편의 외사촌 형수님의 언니분이 해녀이신 덕분에, 외삼촌 제삿날이면 제사상에 꼬치로 올라온 전복과 소라를 일 년 치 몰아서 먹고 온다.


제주 미식 생활의 시작은 단연 ‘귤’이다. 제주에서는 “귤을 돈 주고 사 먹으면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말정설로 통한다. 상품성이 조금 떨어지는 ‘파지 감귤’이나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꼬다마(작은 열매)’를 이웃끼리 산더미처럼 나눠 먹기 때문이다.

돈 주고 사 먹으려면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황금향, 레드향, 카라향, 한라봉 같은 시트러스계의 명품 과일도 파지로 넙죽넙죽 받아먹다 보니 내 입맛만 한없이 고급이 된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서 후식으로 나눠주는 평범한 노지 귤 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오만한 혓바닥이 된 것이다.

이 집 저 집에서 건네받아 현관 앞 노란 플라스틱 컨테이너 박스에 쌓여 ‘귤 풍년’을 이룰 때면, 이게 바로 제주의 인심인가 싶어 마음까지 풍요로워진다.

혼자 다 먹다가는 인간 귤이 될 판이라, 이 귀한 ‘파지 부심’을 육지의 여동생과 베프에게도 넉넉히 하사한다. 제주에 언니 둔 덕분에, 제주에 친구 둔 덕분에 귤 상자 세례를 받는 그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외친다.



“이게 바로 제주 사는 맛 아니겠니!”



한편, 나의 최애였던 광어회와는 작별을 고했다.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다 보면 마주치는 거대한 검은 지붕의 정체, 바로 양식장을 알고 나서부터다. 항생제가 섞인 사료를 먹고 자란 양식 광어보다는 자연의 맛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겨울철 특대방어의 그 기름지고 ‘베지근한(고소하고 진한)’ 맛을 알아버린 뒤로, 그리고 남편이 갓 낚아 온 참돔의 쫄깃한 식감에 길들여진 뒤로 광어회는 뒷전이 됐다. 남편 지인들이 툭 던져주고 가는 싱싱한 한치와 문어까지 가세하니, 나의 미식 리스트는 이제 특대방어와 한치가 상위권을 독차지하고 있다.


국물 요리도 파격적이다. 제주는 생선에 배추나 무를 넣고 소금과 된장으로만 간을 한 말간 ‘지리’를 즐겨 먹는다. 처음 본 ‘갈칫국’과 ‘각재기(전갱이) 국’은 비릴 것 같다는 선입견에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지만, 웬걸. 큰 시누와 둘째 시누가 정성껏 끓여주신 국물 한 입에 그 편견은 눈 녹듯 사라졌다. 찬 바람이 불면 남편 손을 잡고 각재기국 맛집을 찾아가는 건 이제 우리의 연례행사가 됐다.


제주로 시집와서 단순히 식성만 바뀐 게 아니다. 음식을 대하는 마음과 ‘먹는 법’을 새로 배웠다.




콩잎

석 장의 꼭지 따고 포개어 뒤집으면

한 젓갈 멜젓 얹어 한 숟갈 곤밥 얹어

내 한 입 낭군 한 입 버무린 콩향과 잎향



멜젓(멸치젓)의 비린 맛을 콩잎의 거친 촉감이 보듬고, 하얀 곤밥(쌀밥)이 그 조화를 완성할 때의 희열이란. 나는 그렇게 입으로 들어오는 소박하고도 강렬한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 혀끝부터 천천히 제주 현지화되어가고 있다. (아참, 아직도 자리젓은 못 먹고 있다. )

이전 11화11화 설은 애기와 늙은 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