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어머니께 불려 가 점심 한 끼 했을 뿐인데, 다음 날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어머니께서 점집에라도 다녀오신 듯, 딱 55일 뒤인 2월 29일을 결혼날짜로 받아와 큰아들과 큰딸에게 일방통보하신 거였다. 그에게 소식을 전해 듣는 나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코로나가 막 터져 어수선한 시국이었고, 나는 화북, 그는 표선에 살고 있어 함께 살 집조차 없었다.
그런데 ‘하자!’고 덤비니 결혼이란 게 진행이 되긴 됐다. 일단 보름 만에 그를 데리고 인천 친정으로 날아갔다. 내 아버지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다 손부터 덥석 잡으며 하소연을 시작하셨다.
“고맙네, 허서방. 난 우리 큰딸이 시집도 못 가고 늙나 했네!”
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지만, 그는 장인어른의 환대에 대단한 표창이라도 받게 된 양 의기양양했다.
육지에 다녀온 뒤 닷새 뒤가 설날이었다. 그날, 열네 평짜리 시어머님 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나 하나 보겠다고 오십 명이 넘는 가족들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세배와 세뱃돈이 오가고, 거실에 펼쳐놓은 교자상 위에 음식들은 족히 스무 번은 차려지고 치워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명절은 생전 처음이었다. 나는 정신을 반쯤 놓은 채 실시간 ‘유체이탈’을 경험했다.
설 다음날, 예비 시어머니는 쉬지도 못하게 우리를 앞장 세웠다. 오늘 안에 꼭 예식장을 잡겠다는 심산이셨다. 함덕은 ‘리’이지만, 멋진 바다를 품은 제주 3대 해수욕장 중 하나를 끼고 있어 대연회 홀을 갖춘 호텔 리조트가 즐비하다.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 찾아간 리조트에서 원하는 날짜에 예식이 가능했다. 직원이 계약서를 가져오자, 시어머니는 가방에서 ‘천만 원’ 짜리 현금 뭉치를 꺼내 테이블에 툭 올려놓았다. 나와 그, 리조트 직원은 입이 딱 벌어졌다. 설 연휴에, 한 달 뒤에 치를 식장을 잡아, 현금으로 바로 꽂아버리는 포스라니. 오직 이곳이니까, 그리고 내 시어머니라 가능했다.
‘스드메’를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형의 직장 부하의 아내가 웨딩사진가라며 소개를 받았다. 2월 초에 예복을 고르고 바로 웨딩촬영을 했다. 이게 괸당의 파워였다.
입춘도 전이었지만 제주의 야외 촬영 장소들은 꽃이 피고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사진가는 날씨도 받쳐주고 신부의 미소도 완벽하다며 칭찬을 쏟아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사방에서 띄워주니 시집을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우리 앞에 코로나 따위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나의 가족은 친정아버지만 내려오셨다. 요양원에 계신 친정어머니와 여동생네 가족은 코로나사태로 올 수 없었다. 40년 지기 베프 친구 부부는 손소독제에 일회용 장갑까지 끼고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결혼식까지 무사히 마쳤지만, 식 다음날에 함덕에서 코로나 확진자나 나왔다는 보도가 떴다. 호텔에 근무하는 시누는 직장에서 심문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도 신혼여행은 꿈도 못 꿨다. 남편은 결혼 휴가를 일주일 받았지만, 여행 대신 시어머니와 큰 시누, 둘째 시누를 모시고 골괭이(호미) 들고 꿩마농(달래)을 깨러 다녔다.
남편은 쭈뼛거리며 미안해했고,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남편 후배는 결혼식도 신혼여행도 취소하고 예약금까지 날렸다고 하니 말이다.
신혼여행 대신 제주 들판에서 봄나물을 캐며 웃던 그날, 이보다 더 추억에 남을 이색적인 신혼여행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