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첫날, 자기소개 시간.
“안녕하세요. 저는 ‘육짓 것’이고요, 입도 7년 차입니다. 이장선거에 두 번 투표했고요. ‘수넝굴 허치비’ 칠 남매 막내아들과 결혼해 아흔둘의 홀시어멍 곁에서 살고 있습니다.”
좌중에서 웃음과 탄식이 동시에 터졌다.
육짓 것[육지 사람], 입도[섬에 들어 옴], 수넝굴[마을 옛이름], 허치비[허씨네] ….
7년 전만 해도 내 사전엔 없던 단어들이다. 그런데 제주에 살다 보면 이 기묘한 단어들이 표준어보다 더 입에 착 붙는 순간이 온다.
마치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현지어를 섞어 쓰듯, 나의 언어 체계도 조금씩 제주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안면을 익힌 삼춘[동네 어른을 가깝게 부르는 말]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거침없는 호구조사다.
“어디 사멘?[어디 살아?]”
“함덕 4구 살아요.”
“시어멍이랑 고치 살멘?[시어머니와 같이 살아?]”
“아뇨, 시어머님 댁은 2구예요.”
“4구멘 웰막인디, 그디 바당 가차운 덴게. 보롬만 불민, 모살이 하영 날아오주. 일년에 모살 한 말은 먹으멍 살았젠 허주게. 요새사 바당 가이가 금값이주게만, 연날엔 그디 보롬 불고 모살 날리난 사람 살 데 아니랜 허멍 거들떠도 안 봤주… 아덜은?
[4구라고 하면 웰막(옛 지명)인데, 거기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바람만 불면, 모래가 많아 날아오지. 일 년에 모래 한 말(약 18리터)은 먹으면서 살았다고들 하지. 요즘에야 바닷가 쪽이 금값이지만, 옛날엔 거기 바람 불고 모래 날리니까 사람 살 곳 아니라고 해서 거들떠도 안 봤어.… 아이는?]”
“없어요. 늦게 결혼해서…”
“요새사 시집 장게 느지기 가고, 아덜도 느지기 낳던게.”
“그게, 나이가 많아서…. 포기했어요.”
“몇 설[몇 살]?”
“올해 쉰이에요.”
“메께라![세상에!] 기영 안 보옄게! 기껏해야 마흔 초반으로밖에 안 보염주게.”
“하, 감사합니다.”
자기 할 말이 먼저이고, 버럭 대듯 묻다가도 마지막엔 툭 하고 던져지는 ‘마흔 초반’이라는 말에 나의 광대가 승천한다.
이게 바로 제남, 제녀의 ‘츤데레’매력이다. 처음에는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이 투박한 질문들이 ‘우리 괸당[친척/이웃] 될 준비가 되었느냐’는 환영 인사처럼 들린다.
지금이야 귀가 트여 대화가 가능하지만, 결혼 3년 차까지만 해도 나는 집안에서 낯선 육지 며느리였다.
시어머니와 남편, 시누이들이 제주어로 대화를 나누면 내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나 시누이가 통역을 해 주었다.
가끔 나와 시어머니의 동문서답식 대화를 지켜보던 남편이 "말은 엉뚱한데 뜻은 통한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연애할 때만 해도 제주는 그저 이국적인 휴양지였다. 푸른 바다와 야자수, 예쁜 카페가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 후 함덕이라는 ‘리(里)’ 단위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이국적이었던 느낌은 곧 ‘이질감’으로 변했다.
칠 남매 막내아들과 결혼해 아흔둘 시어머니 곁에 앉아 있으면, 내가 꼭 한국어 서툰 결혼이주여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같은 한국 땅인데, 왜 시어머니 말은 토익(TOEIC) 리스닝보다 어려울까. 제사 때마다 모이는 괸당들의 대화는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쳤고, 나는 그 파도 위에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이방인이었다.
제주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섬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주소지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새로 배우는 과정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모래 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함덕 사람들의 강인함, 가족보다 끈끈한 ‘괸당’ 의리, 그리고 투박한 사투리 속에 숨겨진 따뜻한 속정까지.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육짓것’ 딱지를 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시어머니의 “밥 걸어 먹으라 [밥 퍼다 먹어라]”는 말에 “어머니, 먹었어요.”라고 씩씩하게 답할 줄은 알게 되었다.
가끔 창밖의 에메랄드빛 함덕 바다를 보며 생각한다.
‘여기 한국 맞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글쎄’ 일 때가 많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이국적이고도 이질적인 섬이 이제는 내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나의 ‘삶’이 흐르는 진짜 우리 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