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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타자기 Jan 28. 2024

슬라임의 세계

장기 연애 커플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법

  크리스마스를 앞둔 금요일, 퇴근하고 집에 오니 Y가 있었다. 토요일에 오려고 했는데 일찍 왔다고 했다. Y는 늘어놓은 옷가지 틈으로 두 발을 딛고 뚱하게 서 있었다. 뭔가 불만이 있다는 표시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그냥, 좀 늦게 마쳤어.”

  딱히 늦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Y도 진짜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닐 터였다. Y는 그냥 기다리기 지루했던 거다. 슬라임도 없고 다꾸 용품도 부족한 우리 집은 Y 혼자 시간을 보내기엔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Y는 내 성의 없는 대답에도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케이크는?”

  케이크를 찾으러 가기로 한 날은 토요일이었으므로 케이크가 있을 리는 없었다. 대신 나는 봉지 가득 담긴 떡볶이를 보여줬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학원에서 떡볶이 파티를 한 뒤 남은 걸 챙겨 온 거였다.

  “케이크는 내일이잖아. 오늘은 이거나 먹자.”

  우리는 스테인리스 냄비에 떡볶이를 담아 책상으로 가져갔다. Y가 각자의 그릇에 예쁘게 나눠 담자고 하는 걸 설거짓거리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거절했는데, 막상 냄비째 먹으려니 불편해서 결국 그릇에 담아 먹었다. 설거짓거리만 더 늘린 셈이었다.

  떡볶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낮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Y는 퇴근 후 곧바로 우리 집에 와서 내내 슬라임 영상만 찾아봤다고 한다. 내 눈엔 색만 예쁠 뿐 밀가루 반죽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Y는 슬라임을 공룡 화석쯤 되는 듯 신기하게 바라봤다. Y에 따르면 슬라임은 얼핏 보기엔 비슷해도 촉감과 후각은 제품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촉감은 그렇다 쳐도 후각도 다르다니. 내가 궁금해하자 Y는 제품 디자인과 어울리도록 향을 첨가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디자인은 다 비슷한 거 아냐?”

  “안 그래. 예쁜 게 얼마나 많은데. 볼래?”

  Y는 곧바로 유튜브에 자기가 좋아하는 슬라임 영상을 검색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슬라임이 뭉개지기 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슬라임과 그 위에 뿌려진 하늘색 구슬, 눈을 까뒤집은 채 누운 펭귄 모형까지. 펭귄이 누운 자리만 흰색이고 나머지는 파란색인 걸 보아 빙하와 바다를 표현한 것인 듯했다. 과연, Y가 예쁘다고 할 법한 디자인이었다. 아니 Y가 아니더라도. 자세히 보니 하늘색 구슬은 부서진 빙하였다. 지름 10cm도 안되는 작은 플라스틱 컵에 남극의 위기가 재현된 것이다. 내가 감탄하는 동안 Y는 슬라임에 관해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슬은 슬라임이랑 같이 섞는데, 이것도 슬라임마다 디자인이 달라. 토핑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파츠라고 불러. 펭귄은 그냥 데코 용이야. 저건 안 섞어.”

  “펭귄은 그럼 버려?”

  “몰라. 알아서 하겠지.”

  불쌍한 펭귄. 슬라임의 세계에서도 위기구나. 디자인의 의도를 생각해서라도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굳이 말하진 않았다. Y의 말처럼 유튜버는 곧 펭귄 모형만 떼어 놓고 슬라임을 뒤섞었다. 슬라임 세계의 하이라이트인 ‘플레잉’ 시간이었다.

  슬라임은 늘어졌다 뭉쳤다 하며 유튜버가 만지는 대로 형체를 바꿨다. 흰색과 파란색의 경계는 옅어졌고 처음에는 없었던 기포가 생겨났다. 유튜버는 손끝으로 슬라임 여기저기를 찌르고 기포를 터뜨리며 놀다가 어느 순간 슬라임을 넓게 펼치며 책상에 내리쳤다. 슬라임은 지름 15cm 크기의 풍선이 되었다.

  “어때, 굉장하지?”

  “응, 진짜 굉장하다.”

  나는 어느덧 진심으로 그 세계에 몰입하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Y는 더 신나서 떠들었다. 조금 전처럼 바닥에 내리쳐서 풍선을 만드는 걸 ‘바풍’이라 하는데, 바풍 말고도 풍선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쯤 더 있다고 했다. 와우, 저 작은 장난감으로 이토록 다채롭게 놀 수 있다니. 게다가 슬라임의 종류는 또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떡볶이의 수분이 날아가 푸석푸석해질 때까지 슬라임 영상을 찾아봤다. 몇 개를 봐도 지겹지 않았다. 슬라임의 세계는 우리가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넓고 다채로웠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Y가 좋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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