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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타자기 Jan 12. 2024

건강을 챙기는 이유

자기애에 관하여

  부쩍 건강을 챙긴다.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배달 음식을 줄였다. 영양제도 빠짐없이 챙겨 먹는다. 코엔자임 q10과 비타민D, 멀티 비타민, 영양제는 아니지만 홍삼 진액까지. 원래는 비타민C도 먹었는데 이번 주엔 천혜향으로 대체했다. 쿠팡에서 샀는데 맛은 없었다. 그래도 영양제랑 달리 끼니가 된다는 점은 좋았다. 물론 또 사 먹을 생각은 없다. 자주 사 먹기엔 아무래도 좀 비싸.

  

  영양제를 살 땐 호기심에 해 본 유전자 검사가 도움이 됐다. 무려 70여 개의 항목을 검사해 결핍할 수 있는 영양소를 알려준다니. 우와, 이거 완전 가타카잖아? 9만 원이라는 검사 비용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평생 영양제 고민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합리적인 소비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탈모 유전자도 검사해 준다는데 안 하기가 어려웠다. (검사 결과 다행히 나는 앞으로도 풍성풍성할 듯했다.)

  

  그렇게 해서 챙겨 먹기 시작한 게 위의 영양제였다. 검사 결과에 따르면 나는 비타민D가 특히 부족할 거랬다. 조금 억울한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집에만 있는데 광합성 효율까지 나쁘다니. 어쩌면 효율이 나빠서 집에만 있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나란 인간은 애초에 영양제나 챙겨 먹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굳이 비타민D를 합성하겠다고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일종의 버그인 셈이다.


  사실 건강을 챙기든 안 챙기든 생활하면서 체감하는 변화는 없다. 나는 여전히 늘 피곤해하고 축 늘어져 있다. 운동을 하면 체력이 는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는 체력을 다음번 운동할 때 다 써버리니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게다가 운동하는 만큼 글 쓸 시간이 줄어들어 죄책감 같은 게 생긴다. 하루키는 매일 수 키로 씩 달리면서도 그 많은 작품을 썼으니 결국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아, 아니다. 핑계인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죄책감이 드는 거겠지. 떳떳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건강을 챙기면서 얻는 장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잘은 모르겠지만 건강해지고 있을 거다. 말하고 나니 당연한 얘길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어쨌든 장점이기는 하니까. 두 번째는 기분이 좋다는 거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기분은 좋다. 이유는 별 거 없다. 나는 그냥 나를 위해 뭐라도 한다는 게 좋다. 소중할 건더기가 없어서, 모든 사람은 소중하다는 말도 딱히 위로가 되진 않았는데 그런 와중에도 나는 나를 챙겨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낯간지러운 얘길 하고 싶진 않다. 나도 소중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세상 모두가 그런 존재일 텐데. 중요한 건 그런 걸 따지지 않아도 나를 챙기는 데엔 지장이 없다는 거다.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하는 건 줄고 싫어하는 건 느는 느낌이다. 최근에 싫어하는 건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 단체로 최면에라도 걸린 듯 남발하는 ‘love yourself’다. 으, 싫다, 싫어. 사랑하고 말고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면 권태기는 왜 있는 것이며, 왜 그 많은 사람이 증오로 사람을 죽이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참 많다. 대학 시절 학생들을 수시로 모욕했던 언론영상학과 교수와, 왜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소원해진 친구, 내 머리를 엉망으로 잘라 놓고 스타일링으로 감추려 했던 헤어 디자이너, 나한테 코인 매수하라고 은근히 부추긴 학원 강사까지. 모두 사랑해주고 싶은데 잘 안 된다. 특히 그 교수는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한 대 때려주고 싶어. 상상 속에선 이미 수십 번도 더 팼는데 현실에선 그럴 수 없으니 늘 아쉽다. 마음먹기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듯 나를 사랑하는 일도 마음먹기만으론 불가능하다. 예쁜 구석이 있어야 사랑하지. 말도 참 웃겨. 나를 사랑한다는 건 대체 어떤 거야? ‘나를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뭐 이런 건가?


  감정을 다룰 수 있다고 쉽게 착각하자만 그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긍정적인 일이 있으면 긍정적으로 느끼고 부정적인 일이 있으면 부정적으로 느끼는 게 사람이다. F1을 누르면 웃고 F2를 누르면 우는 게임 캐릭터처럼 감정을 간단히 조작할 순 없다. 그게 되면 사람보다는 로봇이나 성인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예수도 참 대단하지. 자기를 배신한 사람도 사랑했으니. 그렇지만 예수도 자기를 사랑하진 않았을 거야.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걸 보면.


  사랑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내가 어깨를 만지면 얘는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집에 오는 길에 미니스톱을 들러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 오면 얘가 좋아해 줄까, 내가 쓴 구질구질하고 자질구레한 이 글을 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같은. 나는 매번 상상하고 흐뭇해하고 괜히 웃고 혼자 만족하고 그런다. 반면 나를 상상하는 일은 안 좋은 감정을 남긴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이번 달에는 돈을 좀 아낄 수 있을까, 체지방을 더 뺄 수 있을까. 사랑으로 치환되기엔 너무 걱정투성이인 질문들. 나를 만드는 질문은 늘 불안으로 가득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힘들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그 말이 여기저기 팔아먹기 좋은 말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척하지만 결국 뜯어보면 ‘자신감을 가지세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의 다른 버전인 말들. 항우울제에 내성이 생기듯, 말에도 내성이 생기는 법이라 다양한 위로법이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말이 위로가 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나를 기만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불행하진 않다는 거다. 나는 잘 살 수 있다.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언젠가는) 해외여행도 갈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 여전히 나아질 수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해서 병원을 가고 약을 먹는 게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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