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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내가 사랑했던 너에게

그녀에게 쓰는 편지

by 안전기지민

갑자기 봄이 찾아와서 당황한 나는 문득 늦기 전에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한 잔 하다가 얼른 펜을 들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만난 그녀에게. 동창이었던 그 친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쓰고 결국에는 발송하지 못할 거란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글이란 그렇게 해소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한 때 내 절친이었던 S에게 편지를 썼다. 참고로 나는 부산에 있는 한 여중, 여고를 나와서도 여학생이 가득한 자연대에서 언어치료학을 전공했다.


안녕? 오랜만이지. 맞아. 네가 날 찾지 않기에 내가 그냥 널 부르는 거야. 우리는 중학생 때 만났지. 너는 첫 입학식 때 4살 난 동생을 등에 업고 나타났어. 너는 고작 14살이었는데 네 동생은 어려서 집에 혼자 있을 수 없어서 데리고 나왔더랬지. 다들 깔끔한 교복을 입었지만 너는 네게 너무 커 보이는 마이를 입고 나타났어. 아마 셔츠와 치마, 조끼, 마이 모두 다른 브랜드였나 봐. 아니, 브랜드가 아니었나 봐. 그래도 나는 너의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네 동생은 네가 어딜 가나 다리에 붙어 있더라. 교실 한쪽에 있어도 선생님이 눈 감아주던 그런 때였어. 그리고 너는 학교가 마치자마자 동생을 데리고 집에 가야만 했어. 우리랑 같이 학교 앞 분식집에 가고 싶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절대 말하진 않았지.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어. 네가 집에 가서 동생 좀 놔두고 학교 가고 싶다고 네 엄마에게 화를 내었다는 걸. 열흘인가 후에 너는 혼자 학교에 올 수 있었어.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었어. 뭐랄까. 학생이 가지면 안 될 것 같은 책임감과 가장의 무게가 네게 있어서 그랬을까. 아무튼 뭐 비슷한 거라고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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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시간 후 청소 시간이었나? 운동장 계단에 앉아서 몰래 챙겨 온 음료수를 깠어. 나는 네 것도 준비했지. 너는 이런 거 학교에서 마셔도 되냐고 물었어. 당연하지. 인마. 매점은 왜 있는데 그럼. 그리고 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어. 난 네게 꿈이 뭐냐고 물었어. 너는 꿈이라기보다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지. 네 이모가 다니는 공장에 17살에 가야 한다고 했어. 어? 17살이면 고등학생이 돼야 하는 거잖아, 하면서 나는 깜짝 놀랐지. 너는 고등학교에 안 갈 뿐, 학생은 학생이라고 했어. 너는 아래에 동생이 둘이나 있다고 했지. 바로 아래 동생은 5살이 어려서 국민학교에 다닌다고 했고 그 아래 동생은 태어나서 일찍 천국으로 갔다고 했어. 그러고 나서 10살 어린 동생이 태어났다고 했지.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는데 비리가 있어서 5년 전에 잘리셨다고, 그 이후로 가계가 기울었다고 했어. 어머니는 다른 집에서 보모로 일한다고 했지. 다리가 안 좋으신데도 일을 많이 하신다고. 그 집에서 가끔 음식을 얻어 오신다고. 이렇게 많은 속사정을 아무렇지 않게 너는 말했어. 나는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내가 가진 모든 게 부끄러움으로 고스란히 남았어. 그러고 우리는 교실로 돌아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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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빠다코코넛과 사이다를 먹으며 우리는 영화를 봤어. 러브레터였는데 흰 눈이 가득했어. 근데 여주가 남주를 그리워하며 소리치는 장면에서 난 오열했지만, 너는 그냥 하얀 눈밭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어. 네가 한참 있다 말해주더라. 아버지가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직장에서 사직을 당하신 뒤로 집에서 술과 사이다만 퍼마시다가 합병증이 왔었다고. 근데 자기가 이렇게 사이다를 마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흰 눈은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어. 너는 세 살 때 아빠가 너를 등에 가만히 업고 집으로 가는 고즈넉한 언덕을 걸으셨다고 하더라. '숙아, 우리 숙이.'라는 말만 기억이 난대. 너무 추운데 아빠 등은 따뜻해서 너는 못 들은 척 가만히 눈을 감았대. 몰라, 나는 그런 적이 없어서 몰라. 근데 너는 그 장면이 떠올라서 울었대. 너는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7살이 되면서부터 건너 마을까지 걸어가서 아버지를 위해 주전자에 동동주를 떠 왔다고 했어. 근데 네가 한 그 행동이 아버지를 일찍 돌아가시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든다고 했어. 그때에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쓰진 않았어. 그 단어가 아닐까 싶어. 근데 죄책감보다는 그리움이 너를 너무 덮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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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자고 간 날이야. 네 동생이 우리 집까지 뛰어와서 얼른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지. 엄마가 부른다면서. 네 둘째 동생은 파마도 안 했는데 곱슬머리더라. 나중에 한참 크고 옆집 이모에게 들었어. 네 동생이 18살이 되던 해, 서울로 혼자 상경해 버렸다고. 그 이후로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한 교회 긴 의자에서 잠이 들었는데 젊은 전도사님이 네 동생을 발견하고 방을 내주면서 지내라고 했다더라. 나중에 네 동생이 연세대에서 심리상담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는 17살이 되어서부터 공장에 갔는데.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는데. 네 동생은 어떻게 대학에 간 거야. 그것도 명문대에. 좋아해야 할 일이겠지? 네가 돈으로 계속 도왔으니까 가능했을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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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막 자라서 우리는 스무 살이 되었어. 나는 부산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갔어. 그리고 네 소식을 듣지 못했지. 어느 날 동창회에 갔는데 네가 있는 거야. 나는 너무 반가워서 너와 약속을 따로 잡고 헤어졌어. 일주일 뒤였던가, 카페에서 만난 너는 여전히 그 공장에 다니고 있었어. 총무가 되었다면서 다 큰 거 같더라. 그리고 네 엄마가 많이 아프다고 말해줬어. 심장에 피가 모자라서 나라에서 제공하는 한 기관에서 심장 투석을 정기적으로 받는다고 했어. 나는 네가 너무 가여웠어. 그날, 내가 좋은 거 못 사준 거. 지금도 미안해. 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아무것도 쥐어 주지 못한 거. 지금도 사과할게. 내가 철없이 캠퍼스를 누비면서 네가 힘들었을 지난날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도 용서해 줄래. 그냥 받아준다고 말해주면 안 될까?

*

스물네 살이 돼서 다시 만난 너는 결혼을 한다고 했어. 딱 두 번 밖에 안 본 남자랑 한다고 했어. 그리고 그 남자는 하동 출신에 키가 크고 자상하다고 했어. 나는 취업을 해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어. 다음 날이 면접이었거든. 그렇게 나는 직장을 다니고 너는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았대. 딸이라더라. 내가 보러 간 날, 너는 이미 엄마가 다 돼있었어. 딸이 말을 한다고 좋아했어. 남편은 집에 늦게 들어와서 혼자 육아를 한다고 했어. 둘째를 낳을 땐, 너 혼자였대. 남편이 발목을 다쳐서 다른 병원 정형외과에 입원을 해서 네가 있는 산부인과에는 오지 못한다고 했어. 네가 둘째를 출산했을 때, 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울었다고 했지. 네 시아버지가가 딸을 원했었다고. 아니었어. 너는 네가 살았던 삶을 또 딸이 겪을까 봐 두려웠던 거야. 딸은 이렇게 찬 바람맞지 말라고. 차라리 아들이면 괜찮겠다, 싶었나 봐. 근데 너는 지금도 둘째 딸을 더 사랑하잖아. 어떻게 된 거니. 싫다더니 왜 그렇게 지금도 죽고 못 사는데. 둘째 딸은 막 커서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고 했지. 내가 멀리 있어서 못 가본 거 미안해. 근데 나도 네 둘째가 더 마음이 가더라. 네가 말했지. 둘째가 갑자기 생겨서 당황했다고. 근데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라고. 안 낳았으면 큰 일 날 뻔했다고. 널 닮아서 더 좋다고 말했지. 웃겨. 너 정말. 그리고 이해 돼.

나는 있잖아. 네가 70살이 돼도 네 친구로 있을 거야. 문득 들려오는 네 소식에 몰래 기뻐하고 조용히 축하해 줄 거야. 너는 있잖아. 내 엄마야. 그리고 내 친구였고 연인이었어. 한 때 내 삶에 좋은 추억이 되어준 네게 잔잔한 감사를 전해.

(* 이 글은 글쓴이의 '엄마'에게 쓴 편지다. 글쓴이의 엄마가 중학교 동창이라면 어땠을지 상상하여 쓴 편지다. 누구도 속이고 싶지 않았고 내용은 사실을 바탕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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