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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꼬맹이는 적합한 저작자였다.

작은 일기부터 시작된 창작물

by 안전기지민

12살 때였던가,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색칠공부 책 하나 사기 어려웠다. 어느 날, 교회에서 민무늬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받았다. 나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틀려가면서 삐뚤빼뚤하게 '일기'라는 것을 썼다. 그냥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거기 썼을 뿐인데 점점 내가 겪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을 쓰게 되면서 '소설'이 되어갔다. 그 짧은 글을 혼자 보는 것이 아까워 친구들 한두 명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은 최신 유행하는 알록달록한 만화 시리즈에 빠져 글로만 쓰인 내 공책을 한번 보고 휙 지나쳤지만 나는 보여줬다는 우쭐감이 있었다. 그때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다.


우리 집이 남들보다 얼마나 특별했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내 기억에 하루하루가 다사다난했던 것은 맞다. 아빠는 휘청이는 직장을 다니다가 도박 중독에 빠져 개인 파산을 하게 되었는데 어린 내가 그것을 글로 풀어쓰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소해야만 했기에 매일 아빠와 관련된 행보를 글에 고스란히 남겨놨다. 누굴 보여주기엔 부끄럽다고 그때에도 느꼈던 것 같다. 우리 집에 있었던 그 모든 사건들이 쌓여서 공책 4권이 되었고 나는 일기의 형태로 계속 써 나갔다. 가끔은 과장되어 소설이 되기도 했다. 5학년 2반이 되어서는 매일 일기를 제출해야 했는데 나는 일부 고쳐 나가며 담임 선생님이 사인의 사인을 받았다. 선생님은 가끔 오늘 하루 많이 힘들었겠다는 코멘트를 조심스레 남겨주셨다.


어느 날, 학교 내에서 백일장을 하는 날이 되어서 자신 있는 글 5편이나 시 10편을 공모하라고 했다. 나는 써둔 글이 이미 이렇게나 많았기에 자신 있게 5개를 골랐다. 사실 뭘 골라야 할지 몰랐지만 원고지에 그대로 옮겨 한 편 당 200자를 넘겼다. 맞춤법 검사는 담임 선생님께 부탁드렸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리고 나는 위로를 의미하는 장려상을 받게 되었다. 3명 이상이 받은 걸 보면 꽤나 위로할 일이 많아 보였다.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글쓰기는 습관처럼 클 때까지 지속했다.

나는 크느라 정신이 없었고 수능을 쳐야 했고 대학생이 되었고 친구를 몇몇 사귀어 캠퍼스를 걸었다. 신춘문예 등단을 위한 소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렇게 개성 많은 사람들의 집단이 모인 곳은 처음이었다. 그 중에 아마 내가 제일 글을 못 썼을 것이다. 2학기에는 대학교 내에서 발간하는 문집 만들기에 참여했고 나는 이걸 누가 읽나 싶은 글들을 짜집어냈다. 자료 조사를 하던 중에 한 아동 문집을 발견했다. 거기에 내가 10년 전에 백일장에 제출했던 일기 5편이 삽화와 함께 기고되어 있었다. 나는 일기에 어느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눈에 내 글임을 알아봤다. 나는 내 글이 소리 소문 없이 문집에 실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동 문집을 만든 출판사에 연락해 글을 기고한 담당자의 번호를 얻었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박 OO 선생님은 퇴직 후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동생에게 도움을 주는 중이라고 하셨다. 그 선생님은 그간 아이들의 글이 좋아서 하나씩 모으다 잡지에 싣게 되셨다고 했다. 아이들의 글을 몇 년이나 모아 오신 정성은 갸륵하다만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표기하지 않으시고 다 커버린 당사자들에게 허락도 맡지 않으신 것이다. 출판사에서 일을 하시면서 저작권에 대해 이해가 아예 없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나도 저작권에 대해 몰랐기에 따질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 글이 장려상 밖에 오르지 못한 걸 알기에 부끄러워했던 사람인지라 머뭇거렸다. 다시 연락드린다고 말한 뒤, 나는 저작물 및 창작물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두어 권 빌렸고 인터넷으로도 서치했다. 주변에 법대 2학년인 지인에게도 연락해 물어봤다. 내가 비록 일기로 남긴 글이지만 명백히 내 권리가 있는 글이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애매했던 것은 내가 저작권이라고 등록한 적이 없으며 특허와 같은 효력을 내는지 확실치 않았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저작물은 글 뿐 만이 아니었다. 일기나 독후감 또는 기사 같은 어문 저작물, 작사와 작곡 같은 음악 저작물, 뮤지컬과 오페라 같은 연극 저작물, 미술 작품인 미술 저작물, 직접 카메라로 찍은 사진 저작물, 윈도즈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 저작물, 도표나 설계도 같은 도형 저작물, 영화나 광고 같은 영상 저작물이 존재했다. 중요한 것은 상표나 특허는 특허청에 제출하고 출원해야 효력이 발생했으나 저작권은 창작과 동시에 권리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의 실수는 학생들의 허락을 맡지 않고 잡지에 기고했다는 것이다. 글이 완전히 같지 않고 비슷하게 도용하더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나는 허락받지 않은 내 오랜 창작물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고 다만, 내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고 전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선생님은 다시 연락이 되지 않았으나 출판 담당자가 전화를 받아 나의 저작권이 존재함을 알렸다. 그리고 가정사가 담긴 부분은 부끄러우니 부분 삭제를 해 주기를 부탁했다. 담당자는 내 허락을 맡지 않았고 정확하게 출처를 기입하지 않고 문집에 실은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또 아버지에 관한 부분을 일부 삭제할 것을 약속했다. 나는 굳이 작업물을 지우라고 하지도 않았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통해 저작권의 힘에 대해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간 조금씩 써오던 시를 작사로 발전시켜 보기로 마음먹었다. 작사를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했고 시를 쓰던 능력을 바탕으로 작사를 배웠다. 작곡은 알지 못하지만 내 시가 노래 가사가 되는 경험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내가 써내려 간 가사는 따로 등록을 하지 않아도 저작권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는 몇 번의 계약을 통해 소정의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익이 없더라도 글을 쓰는 행위는 내 모든 감정의 해소가 되며 해방감을 준다. 쓰는 순간만은 무언가가 된 듯 한 기쁨이 느껴지고 완성했을 때의 환희는 나만 느낄 수 있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보이는 순간은 판단받는 시간이기도 하고 내 자랑이기도 했다. 모두에게 딱 맞는 글을 쓸 수는 없으며 도움이 되기도 했으며 차갑게 등한시되기도 했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감안할 부분이었다.

누군가 남긴 순간의 기록도 저작권을 가진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쉽게 도용하고 도용 당한다.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글을 혼자만 써내려 간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저작권을 품고 있을 줄 알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창작의 욕구가 있다. 글이나 예술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통해 해소했고 지금의 삶에도 해소구가 되어준다. 글 써서 뭐 하겠냐는 주변 반응에도 나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글을 쓴다. 아마 여행을 가서도 쓰는 행위를 지속할 것이다. 저작권이 없었더라면 박완서의 글도, 알랭드보통의 글도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저작권이 없다면 창작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고 삭막한 삶에서 누리는 문학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 또한 창작 행위를 깨닫지도, 지속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내가 찍은 순간의 사진, 인터넷에 게시한 글, 내가 만든 영상 등 모두 저작권을 지닌다. 그러므로 누군가 함부로 도용할 수 없고 내 생각을 자신의 생각처럼 가져갈 수 없다. 지금 세대는 정보가 넘쳐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글이 난무한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글과 말이 여기저기 존재하고 책임지지도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책임감을 지는 것, 누군가의 창작물에 대해 권리를 존중해 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 소양이다.

(*이 글은 실제 경험을 일부 포함하여 각색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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