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 삶으로 돌아올 차례
(*이 글은 글쓴이의 생각과 '부모 인문학 수업 - 김종원'을 참고하였다.)
육아를 한 지 83일 차가 되었다. 놓고 있던 글을 조금씩 쓰기 위해 나는 생각의 조각들을 모았다. 삶에 단단한 뿌리를 만들기 위해 삶으로 긁어모으는 자료 조사 기간이 필요했다. 무기력과 일상의 허기에 지친 이들을 위해 그동안 모아 온 내 생각들을 전달하려 한다.
1. 원망의 뿌리에 대해 알기
사람은 힘들고 공허한 시간에 누군가를 원망한다. 대체적으로 태어나서 가장 처음 본 사람, 그 세상을 원망한다. 그것은 바로 '부모'다. 내가 부모가 되어 봐서 알지만 내 삶을 온전히 투자해서 키워낸 아이가 나를 원망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한때는 내 품에서 내 전부였던 아이가 나를 가장 원망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원망의 뿌리는 부모인 사람이 많다. 단단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거나 상처를 받은 기억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연약해서 좋은 기억보다 슬픈 기억을 오래 담는다. 하나의 슬픈 기억을 덮기 위해서는 몇 배의 좋은 기억이 필요하다.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 우주, 전부다. 그런 부모가 아이에게 심어준 잘못된 가치관은 한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나의 부모님은 철없는 시절에 빠른 결혼을 한 탓에 서로를 원망하는 시간을 오래 보냈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다투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고 가족끼리 서로를 배려하는 것을 보고 배우지 못했다. 비록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내 속에는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 있고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가 좀 더 나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본이 되는 삶을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살아 계시지만 떨어져 살아서 큰 왕래가 있지 않다. 그녀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애틋한 마음은 있지만 내 삶이 실로 버거울 때 찾아가서 쉴 나무가 되어 주진 못한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남들보다 출발선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그러나 이미 주어진 것들을 우리는 어찌하지 못한다.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를 성장시킨 것은 부모의 노력이다. 갓난쟁이를 돌보고 키워내는 것은 진짜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신생아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이 공해로부터,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아기를 지켜내고 또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일은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주 별로인 사람이라도 제 자식은 귀하게 여기며 잘 키워내려는 최소의 노력은 한다.
그러므로 원망의 뿌리를 알고 끊어내는 결단이 필요하다. 나는 오늘부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내게 나무가 되어 주지 못한 어머니를 용서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을 만들었겠지만 그것 또한 과거일 뿐 현재의 나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부모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없고 평생 옆에 있어줄 수 없다. 부모의 역할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살려주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무언가를 공급해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설 수 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인지하고 스스로가 바꿔나가고 채워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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