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내 장래에 대해 누구나 고민을 많이 해보는 시기.
고등학교 때 이과에서 공부 한 나는 수능을 생각보다 잘 보지는 못해서 내가 원했던 생물학과나 간호학과는 갈 수가 없었다. 또 뭘 하고 싶을까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시절, 우연히 유덕화가 나오는 '天長地久(천장지구)'라는 영화를 보고 언젠가는 중국어를 꼭! 배워보고 싶었다.
대학 입시 원서를 쓸 때, 고3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다가 중국어과를 가겠다 했더니, 선생님의 표정이 아주 황당 그 자체였던 게 기억난다. "선생님, 저는 어차피 제가 원래 하고 싶던 공부 못하는데, 대충 4년제 아무 데나 성적 맞춰 가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해보고 싶은 공부 해볼게요." 하고 말했고, 선생님은 문과로 가려면 전문대밖에 못 간다 했고 나는 문제없다고 했다.
그렇게 외국어전문대 중국어과를 차석으로 입학했고, 장학금도 거의 다 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은 했지만, 전문대에서 2년 동안 배운 중국어 실력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웠다. 난 중국어를 학교에서도 배우고 열심히 했지만, 대구 시내에 있는 중국어 전문 학원도 따로 다니면서 정말 열심히 했었다. 그래도 졸업해서 어디 가서 써먹을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취직은 해야 했다. 언니들도 모두 일찍 취직해서 집안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고 있었고, 나도 어쨌든 졸업했으니 밥벌이는 해야지. 그래서 친구 언니가 다니던 회사도 소개로 다녔고, 무역회사도 몇 달 다녔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나는 계속 다른 데로 눈 돌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 한 명이 나와 그 당시까지도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그 친구 애인이 대구 K2 공군부대에서 근무했었고, 내 친구와 나는 둘 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아서 어쩌다 친구 따라 친구 애인 면회를 자주 갔다. 그렇게 멀리 서라도 군인들을 종종 보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군인이라는 직업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꾸준히 육군 하사관(지금은 부사관이라고 한다.) 모집에 지원했다. 기억으로는 당시에 거의 두 달에 한 번씩 하사관 후보생 모집 공지가 떴었는데, 그때는 인터넷 온라인 지원이라는 게 없었으므로 나는 서류를 챙겨서 거의 두 달에 한 번씩 대구 병무청을 찾아갔다. 나는 당시에 중국어도 좀 했고, 영어는 나름 꽤 잘했으므로, 그냥 왠지 정보 병과를 가야 할 것 같았고, 병과 지원 1순위를 늘 '정보'로 썼었다. 그런데 계속 떨어졌다.
그렇게 여덟 번째인가 아홉 번째인가... 또 지원 서류를 챙겨 병무청을 찾아갔더니, 이제는 내 얼굴을 아는 어떤 담당자가, 희망 병과를 한번 바꾸어 지원해 보란다. 혹시 하고 싶은 병과가 있으면 일단 군대 가서도 바꿀 기회가 있으니 한번 생각해 봐도 되지 않겠냐며. 다른 것 보다, 이게 병과별 경쟁이라는 게 충격이었다. 어쨌든 1 지망, 2 지망, 3 지망까지 다 쓰니 성적이나 어떤 기준으로 선발해서 거기서 병과별로 나누는 줄 알았는데, 예를 들면 정보를 1 지망으로 쓴 사람끼리 경쟁되고, 보병을 1 지망으로 쓴 사람은 또 그들끼리 경쟁이 된다는 말이었다!
정보는 누가 봐도 여자들이 많이 지원할 것이고, 경쟁률도 높았을 텐데, 나는 그렇게 쟁쟁한 경쟁률을 못 넘고 계속 떨어지고 있었던 거였다. 어디 보자... 여자들이 잘 안 낼 것 같은 병과가 뭔지. '화학'이라는 병과가 눈에 딱! 띄었다. 그래 이번에는 화학을 1 지망으로 써보자! 일단 입대해서 또 다른 내 길을 찾아보자!
그렇게 '바로' 합격하고 2000년 10월 나는 당시 용산에 있던 여군학교(지금은 없어짐)에 하사관 후보생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넷. 부사관으로는 많이 늦은 나이었다. 우리 동기 중에는 빠른 년생인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온 애가 있었으니 그 동기랑은 다섯 살 차이도 났다.
10월에 들어갔으니, 우리는 20주나 되는 후보생 시간을 그 추운 서울의 겨울을 견디며 보냈고, 스물다섯이 되던 해 3월에 임관했다. 후보생 생활을 마치고 나는 육군본부의 정말 바쁘다는 부서로 발령받아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 여군 부사관은 대부분 임관 후 바로 사령부급 이상 부대로 발령받아 사무적인 일을 먼저 했었다. 그러다 장기가 되면 병과 교육을 받고 야전으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육군본부에서 일 년을 조금 더 넘게 근무하던 때에 여군 부사관들도 다 주특기 교육을 받고 야전으로 가라는 지침이 있었고, 그렇게 나는 임관한 다음 해에 화학학교로 입교했다.
화학학교는 6월에 들어갔다. 여름이 한창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모든 것이 혹서기 훈련과 교육이었다. 화학병과는 여름에도 훈련 때마다 방독면을 쓸 일이 많고, 안 그래도 더운 전투복위에 보호의를 입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더운 한여름에 방독면을 한참 썼다 벗으면 방독면에 모여있던 내 땀들이 수돗물 쏟아지듯 왈칵 쏟아지는데, 방독면을 벗자마자 들어오는 그 더운 여름 바람마저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10월에 교육이 끝났고, 나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화학대대에서 본격적으로 전방 부대 근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방에서의 군생활은 정말 쉽지 않았다. 내가 있던 화학부대는 오분대기조부터 뭔 비상대기조도 왜 그렇게 많은지... 젊은 소대장들은 늘 힘들었다.
훈련도 많았고 훈련지원도 많았다. 나도 주워듣는 얘기가 있어 지금은 군대 환경이 많이 바뀐 걸 알지만, 그때는 훈련 한번 나가면 우리 같은 여군은 화장실 한번 사용하는 것도 너무 부담되었다. 같이 근무했던 여군 장교는 훈련 때마다 소변을 너무 참다가 방광염도 여러 번 걸렸다고 했다.
나는 중대에서 홀로 있던 여군이라 한겨울 영하 20도가 넘는 훈련장에서는 A형 텐트를 치고 혼자 자야 했다. 덜덜 떨면서 침낭 속에 핫팩 몇 개 깔아놓고 잠들 때는 "내일 아침 나는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될 수도 있을 거야." 하며 잠들었다. 다행히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다. 하하.
생각해 보면 행군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40킬로가 넘는 야간행군을 비몽사몽 마치고 이른 아침에 복귀하면, 소대장들 모두 소대장실에 앉아서 모두 모양말부터 벗었다. 모두 물집 몇 개 생겼냐 물어가며 발바닥 까놓고 먹던 뜨거운 컵라면은 정말 꿀맛이었다.
보람된 일들도 물론 많았지만 아침 6시 출근, 병사들과 아침 구보, 빡빡한 일상과 훈련, 그리고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했던 전방의 힘든 군생활은 20대 중, 후반 한창 시기에 내가 지금 뭐 하나 싶은 회의가 조금씩 쌓여갔고, 장교들처럼 한두해 보내다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그 당시에는 거의 없는 부사관 생활을 견디며 하루하루 지쳐갔다. 내 청춘을 이렇게 더 썩힐 수는 없다 생각하고 나는 더 늦기 전에 다른 걸 해보자 결심했다. 2005년 3월에 퇴역하고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중국 유학 준비를 했고. 그해 10월에는 중국 시안(西安)으로 중국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떠났다.(그 이야기는 다음에...)
내 지금 모습에 군생활은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생활습관과 다져진 체력등은 퇴역 후 지금까지도 정말 많은 부분이 나의 중심이 되게 해준 것 같다. 4년이 넘는 그 빡빡했던 시간 속에서 시간을 관리하는 방법, 체력단련 방법, 공부하는 방법, 남초 집단에서 여군으로서 무시받지 않고 뭐든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오기 등은 아직도 많이 도움이 되고 있다.
군대에서 나는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다. 임관할 때는 47명 중 4등의 성적을 받아 임관했고, 화학학교 초급반 교육을 받을 때는 남군들하고 다 같이 훈련, 교육을 받으면서 25(?) 명 중 1등으로 교육을 마쳤으며, 포천에서 소대장 생활을 하면서도 9개 소대가 평가받는 소대전술평가에서 남군 소대장들이 있는 소대를 다 제치고 1등을 하기도 했다. 체력은 남군들만큼 따라가기는 힘들었지만, 여군이니까...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참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군생활했었기 때문인지, 떠나기로 마음먹고도 막상 퇴역 신고 하고 부대를 나설 때는 정말 눈물이 너무너무 났다. 펑펑 울었다. 그게 벌써 2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그때 울었던 장면이 가끔 떠오르면 또 울컥해진다. 지나고 나니 그래도 그때 나와서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시작을 해본 게 정말 잘한 일이었지만...
来日方长 : 앞길이 구만리 같다./ 장래에 기회가 많다. 미래가 희망차다.
중국어 공부를 공부하며 배운 来日方长(來日方長)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성어 중 하나다.
뭐든 그때는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그 시기를 지나며 배운 것은 분명히 많고, 그런 것들이 거름이 되어 또 다른 기회의 씨앗이 된다. 그렇게 살며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언제나 있고, 그 기회를 잘 잡는 사람에게 미래는 언제나 희망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