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왕세자와 열등감 쩌는 왕들

by 금낭아

도참설에 의하면 송도는 산세가 안으로 싸안는 형상이라 권신들이 장악하고, 한양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아 장자가 경시되고 차자들이 득세한다고 했다. 『용재총화』

요절한 세자와 장자를 조사해 보니 상당한 숫자였다.


의안대군

조선 건국 후 공신 배극렴·조준·정도전 등이 세자에 대해 논의 하면서, 태조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방번을 광망하고 경솔하다고 하니 태조는 “막내아들이 조금 낫겠다.”다고 한다. 하여 1392년 태조 1년에 배극렴 등의 추천을 받아 여덟 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는 개국공신들이 왕권을 경계하고 신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이었다.

이에 첫째부인 한씨에게서 태어난 이복형 이방원·이방간 등이 불만을 품고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등의 공신들을 죽였다. 태조는 이방석을 살리는 조건으로 이방원의 반역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유배형을 받은 이방석은 궁을 나서자 살해 되고, 태종 때 소도군에 추봉되고 숙종 때 의안군에 추봉되었다.


폐세자 양녕대군

첫 적장자 세자라는 이름을 믿고 방종하게 행동하다가 아우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다.

의경세자

이숭은 수양대군과 윤씨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1445년 세종 27년에 도원군에 책봉되고, 1455년 세조 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한확의 딸 한씨를 빈으로 맞아 월산대군과 잘산대군(성종)을 낳았다. 이숭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20세에 사망하고 성종 2년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인성대군

세조 7년에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3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성종 때 인성대군으로 추증 되었다.

순회세자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었다. 열 살에 윤옥의 딸과 가례를 올린 후 후사도 얻지 못하고 13세에 사망한다.

영창대군

뒤늦게 선조의 적자로 태어나, 선조의 욕심으로 왕위 계승 순위에 오르는 바람에 이복형 광해군에게서 쫓겨나 죽는다.

폐세자 이지

광해군과 중전 유씨의 장자로 광해군 즉위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폐세자가 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배소에서 탈출하다 실패하고 자결을 명받는다.


소현세자

광해군 4년에 능양군의 장남으로 태어나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에 세자로 책봉 되었다. 강석기의 딸을 빈으로 맞고 병조호란 때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심양에서 2백여 명의 종친과 관리들과 함께 조선과 청의 관계를 위해 활약했다.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역과 둔전개간 등을 병행하여 조선인 포로 구출에도 힘을 썼다. 청나라에서 외교능력을 인정받자 인조와 서인세력은 청이 세자에게 선위하라고 할 까봐 세자를 시기한다.

세자는 8년 만에 귀국했다가 두 달 만에 의문사 한다. 학질로 침치료를 받다가 약물 중독으로 죽는다. 세자의 담당 의원 이형익은 세자 귀국 바로 전에 특별채용 되었는데, 인조의 애첩 소용 조씨의 사람이었다. 세자의 의문사에도 인조는 이형익을 처벌하지 않고 장례도 간소하게 치르게 했다.


효장세자

숙종 45년에 연잉군(영조)과 첩실 이씨(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은 첫 손자를 얻고도 반기지 않았는데, 연잉군 생모 최씨가 사망 한 다음 해에 낳았기 때문이다. (3년 상 동안에는 술과 고기도 금하는 터에, 숙빈 최씨가 3월 9일에 사망하고 다음해 2월 15일에 해산을 했다는 것은 연잉군이 모친의 49재도 지나지 않고 합방 했다는 뜻이다.)

영조 즉위 후 경의군에 봉해지고 세자에 책봉되지만, 10세에 사망하고 만다.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이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정조)에 오른 후 효장세자는 진종으로 추존된다.


사도세자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서장자로 태어나 1년 만에 원자가 되지만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죽는다. 죽은 지 보름 만에 복권되었다. 영조가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일찍 죽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조는 세손을 경의군(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계승이 가능하게 하고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못하게 명했다.


의소세손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 사이에게서 태어난 적장자인데 삼년 만에 죽었다. 세손궁 유모가 수유 중에 술과 고기를 먹고 아기를 심하게 흔들었다는 의혹이 있다.

문효세자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난 서장자로 3세에 세자로 책봉 되지만 5세에 홍역으로 사망했다.


효명세자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장남으로 3세에 세자로 책봉 되었다. 8세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관례(冠禮- 성년식)를 치르고 조만영의 딸 풍양 조씨를 세자빈으로 들여, 적자 왕위계승에 준비를 단단히 해 놓았다. 대리청정을 하여 세도가 안동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리청정 3년 만에 갑자기 죽고 만다.



이렇게 하여 조선 역대 왕들 중에 적장자 왕은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 뿐이다. 나머지는 서자와 차자들이 왕위에 올라서인지 역모사건과 환국으로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넷째아들 태종, 태종의 셋째아들 세종,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약점으로 정난공신들에게 휘둘렸고, 병사한 의경세자 대신 왕위에 오른 둘째아들 예종도 즉위 1년 만에 병사하였다.

성종은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이고 그 적장자 연산군은 폐비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떼려다 반정에 죽고, 성종의 둘째아들 중종은 반정공신에 휘둘린다. 중종의 장자 인종은 즉위 1년 만에 병사하고 또 둘째아들 경원세자(명종)가 왕위를 잇고, 명종의 유일한 아들 순회세자는 어린 나이에 병사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서자의 왕위계승이 시작된다.


명종의 뒤를 이은,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 선조는 왕위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에 쩔어 잘 나가는 신하를 시기하여 다 제거했다. 바른말 하는 정여립을 미워하여 쫓아내더니, 정여립의 사람들이 모임을 갖고 왜구를 물리치는 등 이름이 나자 기축사화를 일으켜 능력 있는 사람을 싹 긁어 처형했다.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낸 정언신까지 정여립의 먼 친척이라 하여 죽였으니 임진왜란 때 인재가 부족했다.

서자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세자의 입지를 굳혔지만, 막판에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는 바람에 입지가 불안정 했다. 그래서 즉위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휘둘렸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서자인 선조의 서손자이다. 그러니 반정공신을 우대하랴 왕권도 강화하랴 온 신경을 쓰다가 반란과 전쟁을 겪고 또 겪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린다.

효종은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음에도 세자로 책봉되어 처음에는 세자책봉을 취소해 달라고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김홍욱과 홍우원을 장살하였다.

현종은 부왕 효종의 정통성 문제로 신하들에게 휘둘린다.

적장자 숙종은 왕위에 대한 열등감이 없고 기 센 명성왕후를 닮아 어린 나이에 친정을 시작하여 몇 번이나 숙청작업을 실시하여 집권세력을 갈아치운다.


경종은 모친 희빈 장씨가 사사되었기 때문에 입지가 약했고 후사도 없이 독살의 의혹 속에 급사한다.

그리고 왕위 정통성의 최악 조건인 영조가 등장한다. 인현왕후의 여종에게서 태어난 영조는 모친에 대한 열등감으로, 귀하게 자란 신부를 첫날밤에 소박 놓더니, 결국 두 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다. 후궁 아들 효장세자는 어린 나이에 죽고, 사도세자는 자신보다 명석하고 인기가 높아 시기하여 괴롭힌다. 대리첨정을 시켜놓고는 트집 잡고 면박을 주어 반발심을 갖게 한다. 기어이 세자가 폭발하여 대들자 역모죄를 씌워 죽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최대 열등감인 숙빈 최씨의 지위를 격상시키기 위해 사당을 만든다. 거처였던 창의궁에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려 했으나 대신들이 반대하여 순화방의 종실 집을 사들여 숙빈묘를 만들고, 후에 육상궁으로 격상 시켰다. 육상궁으로 호칭을 격상 할 때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죄인을 붙잡아 어디 사는가 물어 육상묘가 있는 곳을 궁동이라 부른 죄인은 살려주고 육상동이라고 하면 용서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모친의 묘를 ‘능’이라 칭하지 못하다가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가 사망하자 생모를 왕후의 반열에 올린다.

사도세자의 둘째아들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를 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영조가 육상궁을 지어 모친을 기렸듯이,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겨 현릉원이라 이름 짓고 매년 한강을 건너가 참배하였다. 묘가 있는 수원부의 군사에게 급료를 중앙에서 주게 하고, 근처 4개 고을 수령을 번갈아 현륭원 제관이 되게 하고, 제사를 지내는 향관에게 말과 노비를 주는 규정을 만들고, 새 고을의 토지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순조는 정조의 후궁 박씨에게서 둘째아들로 태어나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가 3년간 수렴청정 하였다. 그 후로는 장인 김조순과 안동김씨의 시대가 되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로 8세의 나이에 즉위하여 순조비 순원대비 김씨가 6년간 수렴청정 하였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에 의해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헌종이 아들 없이 서거하자 안동김씨들은 바지왕을 두기로 하고 방계서자인 철종을 앉혔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서손자로, 역모에 연루된 은언군이 폐서인 되어 강화도에 숨어 살면서 낳은 나무꾼이었다.

철종도 방계 중의 방계였지만 역대급 방계 고종이 등장한다.


고종은 흥선군의 둘째아들인데, 흥선군의 계보가 복잡하고 사연도 많다.

인조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 남연군에 봉해 진 것이다. 남연군의 넷째아들이 흥선군 이하응이다.

남연군의 고조부 의원군 이혁은 복녕군의 둘째아들인데 복창군에게 양자로 가 있었다. 복창군이 대역죄로 처형 될 때 숙종이 파양을 명하여 연좌를 피하게 했다. 그래서 살아남아 경종 때 작첩을 돌려받았다. 의원군 이혁이 마흔이 되도록 아들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첫아들 이유일이 일찍 죽은 듯함), 강가에서 유골을 발견하여 비단으로 싸서 정결한 곳에 묻어주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잘 묻어주어 고맙다며 다음 달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과연 다음 달에 부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다시 꿈에 노인이 나타나 “그대 집터가 가문을 보전할 수 없는 곳이라 아이가 장애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과연 아들이 종두를 앓아 눈과 귀가 멀게 되었다. 하지만 성품이 착해 환갑까지 살고 자손도 번창했다고 『동패낙송』에 기록되어 있다.

이 아이가 안흥군 이숙이고 그 증손자가 남연군이다.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군은 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씨와 사군자를 배워, 그 실력으로 세도가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바치며 목숨을 유지했다. 철종 때 수렴청정하던 순원대비(순조비)가 사망하고 철종의 아들들도 요절하니, 다음 왕위 지명권자는 요절한 효명세자(순조아들)의 빈이었던 신정왕후였다. 흥선군은 신정왕후에게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보내주기로 약조하고 총애를 받는다.


흥선군이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 하나가 『계압만록』에 있다.

흥선군이 안성 청룡산에 있는 부친 남연군의 묘소로 가다가 한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남연군의 묘소가 좋지 않다고 말하더니, 왕이 날 명당이 있다고 한다. 하여 흥선군이 따라 가보니 덕산 가야동의 절 법당 뒤였다. 윤식이라는 사람이 ‘왕기가 있는 산에 묘를 쓰느냐’고 항의하자 승려는 남연군 역시 왕손이니 괜찮다며 법당을 불태우고 불상을 부수어 골짜기에 묻었다. (영화 <명당>에서는 지사가 2대 천자가 날 자리라 했다. 설화에서는 승려가 일본인 첩자라는 말이 있다고 해놓았는데, 둘을 합쳐보면,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후 둘째아들이 태어나고 11년 후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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