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사저였던 경덕궁(敬德宮)에 머물며 국가행사는 수창궁에서 치르다가 태조 2년 3월에 수창궁으로 옮겨 앉았다. 다음해인 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해 경복궁을 지었다.
하지만 정종이 다시 개경 수창궁으로 이어했다. 얼떨결에 딸려온 상왕 태조는 옛 수도에 돌아온 것에 화가 나 새벽에 박차고 일어나 시중 윤환의 옛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도성민이 볼까 부끄럽다며 날이 밝기 전에 옮긴 것이다.
7월에 수창궁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옛 사람들은 부엉이가 우는 것을 불길하다 여겼다. 계속해서 올빼미와 여우가 울자 정종은 궁 밖으로 거처를 옮긴 모양이다. 그해 12월에 수창궁으로 환어했다는 기록이 있고, 다음 해에 양온동에 있는 안원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정종은 태조가 머무를 ‘덕수궁(德壽宮)’을 짓게 한다. (태조는 태종 3년에 덕수궁으로 들어갔다.)
정종이 인덕궁으로 옮겨 앉고 이방원에게 선위하여, 정종 2년 11월 13일 태종이 수창궁에서 즉위하고 경덕궁에서 거처했다. 한 달 후에 수창궁에 화재가 일어난다. 태종은 다음해에 왕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갈대로 만든 발을 쳐 가리게 하였다. 그리고 한양천도를 준비하여 태종 5년에 다시 경덕궁으로 옮겼다가 한양으로 천도한다. 경덕궁(敬德宮)은 개경에 그대로 두고 궁지기를 두고 행궁으로 사용했다. (한때 한명회가 이곳의 궁지기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대문과 경덕궁 터였음을 알려주는 비각만 남아 있다고 한다. 후에 광해군이 한양에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는데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태종은 한양의 경복궁을 그냥 두고 향교동에 창덕궁을 지어 들어갔다. 왕자의 난으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경복궁에 들어가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국가 중요행사들은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에서 치른다. 왜냐하면 창덕궁은 주거와 편전 등의 전각만 지어 정전인 인정전은 겨우 3칸 규모였기 때문이다. 태종 13년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경복궁으로 잠시 옮겼다가 두 달 후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온다. 2년 후에 경북궁으로 또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충녕대군에게 양위하기로 결정하고 태종 18년에 창덕궁 개축공사를 시작한다. 아들 세종에게 왕의 위엄을 세워주기 위함이다.
세종은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세종 2년에 무악(毋岳) 밑에 백 칸 정도의 서이궁을 지었는데 세종 7년에 연희궁(衍禧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종은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연희궁에 잠실도회(蠶室都會-누에치기 장려를 위해)를 설치했고 세조 때에는 이곳을 서잠실(西蠶室)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도 왕들이 이곳을 찾아 머물렀는데, 연산군 때는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쓰기도 하다가 후에 폐쇄되었다. 이후 영조 때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묘소인 ‘수경원(綏慶圓)’을 이곳에 조성하면서 연희궁(延禧宮)으로 연자의 한자가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 서대문구 연희동(延禧洞)이 생겨났고 궁궐터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세종은 6년에 경복궁으로 이어했다가 다음해 7월 장의동 잠저로 나갔다가 11월에 경복궁으로 환어했다가 연희궁으로 옮겨갔다가 환궁한다. 또 사정전과 경회루를 중수하기 위해 상림원으로 옮겼다가 동궁으로 이어하고 세자는 상림원으로 옮기게 했다. 13년에 환궁했다가 창덕궁으로 옮겨갔다가 경복궁 강녕전으로 돌아온다. 세종 16년 8월 26일 중전과 세자와 함께 임영 대군 이구의 집으로 이어했다가 강녕전으로 돌아온다. 강녕전에 뱀이 들어와 진양대군의 사저로 나갔다가 돌아온다. 19년 8월 18일 강녕전 남쪽 월랑을 수리하기 세종은 동궁으로 이어하고 동궁은 서연으로 옮겨 거처하게 한다.
그리고 사저로 돌기 시작한다. 다음해에 임영 대군의 집으로 이어했다가 다음 해에 광평 대군 집으로 이어한다. 23년 9월 6일 연창군 안맹담의 집으로 옮겼다가 다음 해에 왕비·동궁과 같이 금성 대군 이유의 집에 이어했다가 경복궁으로 환어한다. 26년에 연창군 집으로, 동궁으로 연창군 집으로, 희우정으로, 연희궁으로, 임영대군 집으로, 수양대군 집으로, 판예빈시사 신자근의 집으로, 효령대군 집으로, 양녕대군 집으로, 평양군 조대림의 집으로, 임영대군 집으로 갔다가 세종 30년에 경복궁으로 환어한다. 다음해에 병이 나서 금성대군 집으로 영응대군 집으로 이어하고 세자는 금성 대군 집에 머물게 하고 또 효령 대군 집으로 갔다가 경복궁으로 환어한다.
문종은 상궁 하나가 죽어 동궁으로 이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궁인들은 죽을 때가 되면 궁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상궁이 궁 안에서 갑자기 죽은 듯하다) 6월에는 경복궁 후원 충순당으로 이어한다.
단종은 어린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삼정승이 정사를 도맡아 하는데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기싸움에 왕권의 불안을 느꼈다. 즉위 다음해 2월에 효령대군의 집으로 옮겼다가 10월에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인 후에 경복궁 충순당으로 돌아온다. 단종 3년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창덕궁으로 옮겨 앉는다.
세조는 왕위를 받아 경복궁으로 들어갔다가 단종을 쫓아내고 세조 5년에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다음 달에 경복궁으로 돌아온다. 세조 7년 11월 세자빈이 병이 들자 세조와 중전과 세자(둘째아들예종, 첫째아들 의경세자는 이미 사망) 만 창덕궁으로 피접했다가 다음해 경복궁으로 돌아온다. 또 다음해 세조 9년 밤에 번개가 쳐서 세조와 중궁이 세자궁으로 이어한다(아마 문종비 현덕왕후의 저주를 겁내한 듯하다). 세조 13년에 병이 나서 화위당으로 옮겼다가 낫지 않아 다시 충순당으로 돌아온다. 한 달 후에 또 창덕궁으로 옮겨간다. 세조 14년 효령 대군 이보의 집으로 피접 갔다가 며칠 후에 자을산군의 사저로 옮겨갔다가 또 며칠 만에 수강궁으로 들어갔다가 사망한다.
예종은 수강궁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한 달 후에 광세전으로 옮겼다가 선정전에 들어갔다가 예종 1년 3월에 경복궁으로 들어간다.
성종은 경복궁에서 즉위한다. 다음 해에 왕대비가 경복궁에서 창덕궁 구현전으로 옮겨간다. 성종 4년 중전이 병이 들어 친정인 한명회의 집으로 피접 간다. 이 때문에 성종은 한명회의 집에 출근하다시피 한다. 성종 10년에 대왕대비와 인수 왕대비가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한증 때문에 경복궁으로 돌아온다. 성종 14년에 성종은 보경당으로 갔다가 숭문당으로 옮긴다. 성종 16년에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을 개축하여 창경궁(昌慶宮)이라 명하고 왕대비와 인혜왕대비를 거처하게 한다. 서거정이 전각의 이름을 짓고 명정전의 상량문은 김종직이 썼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광해군 때 새로 지었지만 화재가 자주 났고, 순종 때 동물원이 들어서는 시련을 겪는다.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즉위 하고 다음 해 봄에 몸이 불편하여 세자 시절에 지내던 동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신하들이 정전으로 환어하기를 주장했지만 연산군은 동궁을 고집한다. 연산 2년 12월에 창덕궁으로 옮기겠다고 전교한 기사는 있는데 이어한 기사는 없다. 하지만 창덕궁 밖 백 자 안의 민가를 철거하고 사람의 왕래를 금하고 궁벽을 높이 쌓으라고 명하는 것을 보면 창덕궁에서 거처한 듯하다. 중종반정 날 반정군이 ‘승지 한순·내관 서경생을 창덕궁에 보내어 고하게 하니, 대답하기를,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 하고 곧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상서원 관원에게 주게 하였다.’라는 기사를 보면 창덕궁에서 폐위 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중종은 8년에 천재지변의 이유로 정전을 비우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중종 10년에 중전의 병으로 내반원에 이어했다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2년 후에 경복궁으로 돌아온다. 대비가 병이 들자 제안대군의 사저로 모셔다놓고 자주 문안하러 갔다. 그리고 창덕궁과 경복궁으로 오가며 지낸다.
인종은 동궁으로 옮겨갔다가 경복궁으로 돌아오는데, 뒤이어 문정대비가 경복궁으로 들어온다. 이때 경회루에 벼락이 내려치니 인종은 병중에 있으면서도 대비가 놀라지 않았는지 알아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흘 후 인종이 사망한다.
명종은 즉위하여 창덕궁의 선정전에 인종의 신위를 모신다. 명종 8년 2월 22일 창덕궁으로 이어했는데, 9월에 경복궁의 대내에 화재가 난다. 창덕궁에 갔다가 경복궁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대왕대비와 왕대비는 창경궁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창경궁으로 갔다가 경복궁으로 돌아간다. 이즈음 명종은 문정대비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외척 이량을 키우기 시작했다.
선조 임진왜란 때 피난 간 사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모두 불타 지낼 곳이 없어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축하여 정릉행궁(貞陵行宮 - 지금의 덕수궁, 정릉靖陵-중종릉과 구별)이라 이름 짓고 임시궁궐로 사용했다.
정릉행궁은 처음에는 태조의 계비 신덕황후 강씨의 능이 있던 자리였다. 태종이 신덕왕후의 능을 성 밖 양주로 이전시키고 정자각 석물은 광통교 보수하는 데 쓰게 하여 사람들에게 밟히도록 했다고 한다. 또 신덕왕후의 존호를 후궁으로 격하하고 봉분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능이 파헤쳐지는 날 폭우가 쏟아지고 하늘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후에 이곳에 조영달이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자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의 소유가 되었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으로 지어 죽은 의경세자의 의묘를 세우고 그 아들 월산대군에게 주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집터에서 귀신이 자주 나타난다는 소문이 났는데 『어우야담』에 보면, 이집에서 키우던 말이 단단히 잠겨있던 누각 안에 들어가 있어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 저택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하여 화재를 당하지 않았는데, 선조는 이곳에 입주하며 계림군의 집을 궁으로 포함시켰다. 심의겸의 집은 동궁으로 심연원의 집은 종묘로 쓰고, 다른 가옥도 궁 안에 포함시켜 승정원도 자리했다. 이 승정원에서 숙직하던 관리들의 꿈에 자주 귀매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이첨이 승지일 때 8척9척 장신의 귀신들이 창 밖에 서 있는 것을 이이첨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고 한다. 작은 귀신들이 큰 귀신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신덕왕후와 궁녀들 귀신일지 억울하게 죽은 조영달의 귀신일지.
선조는 창덕궁 중건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광해군 1년에야 마무리 된다.
광해군은 정릉행궁에서 즉위하고 머물다가 다음 해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법궁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창덕궁이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정릉행궁을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이라 이름 짓고 확장공사를 하여 옮겨간다. 광해군 7년에 창덕궁으로 돌아와 또 새 궁을 짓기 시작한다.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라는 풍수지리를 믿어 인경궁을 짓다가,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일대)에 왕기가 있다는 설이 돌자 왕기를 누르기 위해 경덕궁(慶德宮-영조 때 경희궁)을 짓게 한다. 자재가 부족하자 경운궁 확장공사를 하려 짓던 전각들을 해체하여 경덕궁 건설에 쓰게 했다. 그리고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西宮)이라 불렀다. 새로 지은 경덕궁으로 이어할 길일을 잡다가 인정반정이 일어난다. 반정군은 인목대비가 있는 경운궁(서궁)으로 가서 고하고 어보를 받는다.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해야 했다. 반정 때의 화재로 창덕궁이 거의 전소되었어도 인정전이 남아 있었지만, 인목대비가 기싸움에서 이겨 경운궁에 즉위식을 거행하게 한 것이다. 인조는 일단 창덕궁에 들어갔다가 경덕궁(또는 경희궁)에 거처하고, 경운궁의 즉조당과 석어당 이외의 가옥과 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창덕궁 중건공사를 천천히 진행하여 인조 17년에 창덕궁에 들어갔다. 인조 25년에 공사가 마무리 되는데 자재가 모자라자 인경궁을 헐어다 쓰게 했다.
이후 효종 때는 한 노인이 경복궁 옛터에 초옥이라도 지어 이어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종 때는 두창이 유행하여 공주가 죽자 경덕궁으로 피접한다.
숙종은 창덕궁과 경덕궁, 창경궁을 수시로 오가며 거처한다.
경종은 거의 창경궁에서 거처한다.
영조는 창덕궁과 경덕궁(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개칭)을 오가며 거처한다. (영화<사도>에 대왕대비에게 삐쳐서 이어하는 장면이 있음)
정조는 세손 때 경희궁에 들어가서 지내다가 즉위하였다. 경희궁 존현각에 수상한 자가 침입하여 창덕궁으로 옮겨간다.
순조 11년에 창덕궁 인정전 화재로 순조는 창경궁으로 옮겨간다. 11년 봄에 경희궁으로 옮겼다가 가뭄이 들자 사치를 줄이기 위해 정전을 비워두고 광명전의 자내별당으로 옮겨 앉았다가 석 달 후 창덕궁으로 환궁한다. 그리고 말년에 경희궁으로 이어한다.
헌종과 철종은 창덕궁과 경희궁을 오가며 거처한다.
고종은 고종 5년에 새로 지은 경복궁으로 이어한다. 고종 10년에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2년 후에 돌아온다. 고종 33년 1896년 2월 11일에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했다가 다음해에 경복궁을 그냥 두고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인 정동의 경운궁으로 들어간다.
달랑 두 채만 남은 경운궁 확대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하여 경복궁 전각들을 헐어다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904년에 화재가 나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궁궐 거의 전역이 불타 고종은 황실 도서관 건물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하들이 창덕궁으로 옮기자고 했으나 고종은 외국 공관들이 가까운 경운궁을 고집하고 재건공사를 명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 되어 이태왕으로 격하 되어 그곳에 계속 머문다.
순종은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고종이 머무는 경운궁을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 바꾸었다. 정종이 태조를 위해 지어준 궁의 이름을 사용한 것인데, 덕수궁은 후에 일제가 전각을 헐어내고 광복 후에는 미군이 이곳 석조전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 했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이 주둔하여 미군의 포격대상지였는데 당시 미군 포병장교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가 말려 무사했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해밀턴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순종은 즉위 4개월 후 창덕궁으로 들어갔다가 창덕궁 수리를 위해 경운궁으로 갔다가 두 달 후에 돌아온다. 그리고 1910년 순종 3년 8월 29일에 일본왕에게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기고 ‘창덕궁 이왕’이라 불리며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9년에 사망하였다.
일본제국은 통치권을 넘긴 순종을 달랜다며 창경궁을 훼손하여 일본식 건물을 짓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창경원으로 격하하였다. 그리고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를 만들었다. 1981년 창경궁 복원이 시작되어 창경궁으로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