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중과 민유중 형제는 술을 좋아했지만, 부친이 금해서 마시지 못 했다.
부친이 강원 감사일 때 형제가 찾아가니, 부친이 반가워하며 그 날 만은 마음껏 마시도록 허락하였다.
술에 취한 형제가 객사에서 술을 더 가져오라 하니 하인들이 감사의 영이 있었다며 더 이상 술을 내오지 않았다.
“뭐라? 너의 사또가 손님 대접을 이리 하느냐?”
소리치고 행패를 부리다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 문 밖에서 석고대죄 하였고, 부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서야담>>
민유중은 효종 초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쳤다.
현종 10년(1669년)에 평안감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7월에 봉생이라는 여인이 살인 무고자 부부를 고발해왔다.
“소인은 평양 중화현의 교생 김애격의 안사람입니다. 십 수 년 전에 제 남편이 살인누명을 쓰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던 이지휼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으니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그 내용을 알아보니,
1656 효종 7년 봄에 황해도 수안현의 이지휼이 평양에 들어와 그의 처형 김애격의 집에서 물건을 훔쳐 도주하였다.
이지휼이 귀가하지 않자 그 부친이 관에다 고발하였다.
“김애격이 내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지휼의 숙부와 이지휼의 처 선합은 길가에 죽어있는 시신을 이지휼이라 하였다.
그래서 김애격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김애격의 처 봉생은 선합의 언니였다.
“제 남편은 사람을 해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 시신이 이지휼일리 없습니다. 선합 너는 네 형부를 살인자로 만들어 기어이 죽게 했으니, 기어이 이 일을 바로 잡고 말 것이다.”
하며 이지휼을 찾아다니기를 14년, 기어이 살아있는 이지휼을 찾아내 관에 고발하였던 것이다.
이지휼과 그의 처 선합은 살인 음모죄로 다스려졌다.
이 내용을 보고받은 감사 민유중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봉생에게 정려문이 내려졌다. <<현종실록>>
다음해에 평안도에 흉년이 들었다.
감사 민유중은 장계를 올려 ‘흉년이 심하니 유배자를 다른 도로 이배하고, 더 이상 유배자를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다.
어느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민유중은 노인을 알아보았다.
“태의(太醫) 안효남 어른이 아니시오? 일찍이 공경사대부들의 병세를 보살펴 주셨지요.
(실록에 찾아보니, 효종 3년 때 예조참판 민응형이 병이 들어 사직상소를 올리니, 효종이 태의를 보낸 기록이 있다. 민응형과 민유중은 같은 여흥 민씨이다.) 또 효종께서 위급하실 때에 탕약을 올려 위기를 넘긴 것이 여러 번이었지요.”
“그렇습니다. 황공하옵게도 특별히 첨지를 제수하시니 고향인 해서의 재령에서 구십 세까지 살았지요. 그런데 자손 백여 명이 흉년을 만나 굶어죽게 되었으니 대감께서 구제해 주십시오. 손자 안세원이 재령 유동에 살고 있습니다.”
민유중은 잠에서 깨자 이름을 써 놓았다.
그리고 재령군수에게 안세원을 데려오게 하였다.
재령군수는 안세원을 묶어서 압송했다. (아마도 관에서 빌린 곡식을 갚지 못했을 것이고, 감사가 데려오라 하니 죄인처럼 압송한 듯하다)
감사 민유중이 50섬의 곡식과 일용품 제공하며 친지들을 구제하라 명했다.
이에 감영에 일 보러 왔던 관장들도 곡식을 보태주었다. (아마도 그동안 안세원을 핍박했을 듯, 감사가 곡식을 내어주니 아 뜨거 하고 준 듯)
이후로 안효남 가문에서는 밥을 먹기 전에 한 숟갈 떠서 제를 지내며
“이 밥을 누가 주었느냐?”
“민감사 어른입니다.”
하고 말하고 밥을 먹었다고 한다. <<청구야담>>
후에도 민유중은 감사 일을 충실히 하여 형조판서직을 제수 받아 승승장구 하였다.
서인 산당으로 활동하여 송시열과 뜻을 같이하다가, 숙종 초 남인 정권에 밀려 낙향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숙종 6년(1680년) 경신환국으로 복권되어 형 민정중과 함께 남인을 몰아내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숙종 7년에 딸이 숙종의 계비(인현왕후)로 간택되었다.
하지만 권력을 독점하여 비판을 받고 사직하여 두문불출 하다가 1687년 58세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딸 인현왕후도 2년 후에 폐서인 되어 5년간 고초를 겪는다.
(피의 숙청으로 정권교체가 잦은 숙종 시대에는 자연사 한 신하가 드물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