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동지에서 정적으로, 심기원 대 김자점

by 금낭아

어영대장 구인후는 한밤중에 황익과 이원로가 찾아왔다는 말에 잠에서 깼다. 그들을 만나러 나가려 하니 첩이 붙잡았다.

“심야에 무사가 찾아왔으니 응당 숙직 장교를 불러 무기를 갖추어 방비한 다음에 만나시지요.”

구인후는 일리 있는 말이라 여겨 장교들을 소집하여 위의를 갖춘 다음에 두 사람을 만났다. 사실 황익과 이원로는 거사에 앞서 먼저 구인후를 제거 하려 온 것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심기원의 역모 사실을 고변하고 말았다. 『매옹한록』


1644년 인조 22년 황익이 이름을 헌(瀗)으로 고쳤는데, 이는 역적 황자(黃耔)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황익은 무예로 출세하여 여러 군읍의 수령을 지내다가, 탐학하고 방종한 것 때문에 실패를 보았다. 그런데 고변한 이후로는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였고, 심지어 심기원의 재산이라면 아무리 미세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수색하여 모조리 차지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 뱉고 욕하였다. 『인조실록』


심기원은 세종 장인 심온의 후손으로 심순문의 5대손이이다. 고조부 심달원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종조부이고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유배 되었다가 복위 되었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은 현감과 군수에 머물렀다. 게다가 심기원은 권필의 제자여서 관직에 진출하지 못 하고 있었다. 권필이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을 비난하다가 미움을 받아 유배지로 가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관운이 없는 심기원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병조참판에 오르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때 심기원은 이괄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흥안군을 국문 없이 교수형에 처했다. 이 일로 인조의 눈 밖에 나 겨우 목숨만 부지하였다. 1627년에는 검찰사로 있으면서 박동량의 사면을 청했다가 인조에게 혼쭐이 났다. “심기원이 감히 중죄인을 사면해 달라고 청하니 매우 놀랍다. 중하게 추국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의를 알게 하라.”

정묘호란 때 소현세자를 옹위했고, 병자호란 때는 수도를 방어하는 유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서북쪽을 방어하던 도원수 김자점이 정방산성에 머무르는 동안 청나라 군대가 우회하여 한양으로 들이쳤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가 급히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김자점이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자 인조는 심기원을 제도도원수로 임명하여 남쪽 근왕군을 지휘하라고 명했다. 문제는 인조가 김자점을 삭탈하지 않고 심기원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도원수가 둘이 된 상황에서 양평에 주둔한 군사들은 남한산성을 지원하러 출발하지도 못 했다.

이 때문에 인조는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의 항복을 해야 했다. 그리고 심기원은 삼년간 기용되지 못했다. 그의 당숙 돈녕부 도정 심현은 강화도 피신 중에 부인 여산 송씨와 함께 자결하였다. 작은 당숙 심집은 형조와 예조의 판서였는데, 청에 볼모로 가야하는 인조의 동생 능봉군으로 가장하여 대신 가려다가 발각 되었다.

이런 일이 참작이 되었을까? 심기원은 1640년에 호위대장으로 다시 기용되고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러 청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43년 성절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에 좌의정과 남한산성의 수어사를 역임하게 되었다.

최고직과 군사력까지 쥐게 된 심기원은 말이 날개를 단 듯 겁이 없어졌다. 주위에 장사들을 모아 배치하고 이일원과 경기도 광주부윤 권억 등과 모의 하였다. 인조의 측근들을 잔치에 초청해 모두 죽여 인조를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회은군 이덕인을 왕으로 세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황익과 이원로가 구인후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하여 체포되었다.

그런데 심기원의 역모가 김자점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병자호란 이후 반청의식이 고조되었다. 반청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이귀·이서 쪽을 지지하자, 세력이 약해진 김자점·김류 등은 친청 세력과 결탁하여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이때 심기원이 적극적으로 반청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김자점은 사림학자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글재주로 이름이 높았다. 광해군 때 시험을 거치지 않고 음관으로 벼슬을 하여 병조좌랑까지 올랐는데, 김개시에게 자주 뇌물을 준 덕이었다. 인조반정 때도 거사계획이 탄로 났는데도 김자점이 김개시에게 은덩이를 쥐어주고 무마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 김자점이 평양과 개성을 잇는 봉산의 동선령에서 돌격대를 막는 동안, 청태종의 본대는 우회하여 개성에 도착했다.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김자점에게도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지원하라 명했다.

김자점은 청군을 따라 남하하다가 개성 북쪽의 토산군에 도착했지만 척후를 두지 않아 청나라 군대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새벽에 청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김자점은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남한산성을 향해 남하하여 양근(양평)의 미원현에 진을 쳤다. 이때 김자점은 척후장을 임명했다.

이 상황을 알려주는 얘기가 『풍암집화』에 실려 있다. 1633년 인조 11년 2월 12일 김자점이 도원수(전시에 군대를 통할한 임시 무관직)에 임명되어 남두병을 척후장으로 두었다. 꿈에 남두병의 부친 남이흥이 나타나 아들을 척후장에서 빼내달라고 청하였다. 하여 김자점은 척후장을 교체하였는데, 다음 전투에서 바뀐 척후장은 전사했다. (남두병의 부친 남이흥은 정묘호란 때 안주에서 순국 하였고, 조부 남유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심기원의 역모 추국 때 권억의 공초 내용을 보면, 권억이 심기원과 사담하면서 ‘세자는 심양에 있는데 주상이 갑자기 사망하면 세자를 부르러 가는 사이 흉악한 무리가 난을 일으킬 수 있으니, 미리 무사들을 준비시켜놓았다가 난을 진압하고 봉림대군이나 인평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세자의 귀국이 어려우니 차라리 청 장수의 목을 베어 청국에 보내면 청국이 놀라 세자를 돌려보낼 것이나, 주상이 이미 청인의 위력에 겁을 먹고 청 장수 죽인 조선 장수를 문책할 것이고, 주상이 세자의 귀국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시니 일이 성사될 수 없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김자점은 이때다 하고 심기원이 왕의 폐위를 꾀했다며 역모로 몰았다. 김자점은 심기원 등 반청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연려실 기술』에 심기원의 사형 집행 때, 보통은 죄수의 목을 먼저 베고 팔다리를 베게 되어 있는데, 김자점이 명하여 다리를 먼저 자르고 다음에 팔을 자르라고 하였다.

김자점과 사돈 간인 이시백이 “역적 처형방법은 벌률로 정해져 있는데 새 법을 만드니 과연 무사 할까?”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귀의 아들 이시백 형제도 심기원 옥사에 관련하여 곤욕을 치렀다.


또 김자점은 심양에 있는 임경업도 역모에 얽어 넣었는데, 병자호란 때 청군에 쫓기던 임경업이 명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김자점이 도왔었다. 임경업이 명나라 장수가 되어 청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잡히자, 친청파인 김자점은 임경업이 친국 도중에 이를 발설할까봐 임경업을 죽게 한 것이다.

심기원 옥사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회은군은 두 번이나 역모에 엮인 것이다. 회은군 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증손자로 인조의 숙부뻘이 된다. 하지만, 회은군의 조부는 월산대군의 서자 덕풍군인데 계성군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덕종(세자 장자)의 핏줄이다.

첫 번째 사건은 1632년 인조 10년에 있었다. 임해군 종의 아내가 조세형의 외숙 홍집의 첩에게 이상한 말을 하였다.

‘경창군의 아들 양녕군이 임해군의 집에 양자로 들어왔는데, 경창군이 양녕군을 세우려 한다.“

홍집이 그 말을 듣고 예판 최명길과 조세형에게 말했다. 이것을 조세형이 홍우정에게 말 했는데, 회은군도 이 말을 전해 들었다는 소문이 났다. 이에 놀란 회은군은 자신은 이 일과 상관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소를 올려 고변했다. 의금부에서는 회은군과 관련자들을 전부 심문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회은군을 제외한 관련자들만 심문하라 일렀다.

인조 10년 10월 16일에 국청이 열렸다. 조세형과 홍집이 잡혀와 경창군이 거사시기를 정하는 것을 인목대비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잡혀들어 왔지만 별다른 공초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여종들을 불러다 심문하니, 임해군 종의 아내 어현이 앙심을 품고 거짓으로 꾸민 일로 결론이 났다. 어현을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역모사건 치고 아주 가볍게 지나갔다. 만약 인목대비가 역모 계획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일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인목대비를 추국할 수도 없고, 그냥 두면 또 다른 역모가 이어 질 것이고, 더구나 인목대비가 인조를 왕으로 탐탁치 않아한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니, 인조의 왕권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없던 일처럼 덮고 넘어가야 했다.


1637년 1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회은군은 소현세자를 따라 강화도로 피신하여 강화성 동문을 수비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청나라 군대에게 함락 되고, 회은군의 어린 딸이 적병에게 잡혔다. 청군이 회은군의 딸을 심양으로 데려가 청황제에게 바쳤는데, 청황제는 신하에게 상으로 내려주었다고 한다. 회은군 딸은 볼모로 가 있는 세자 부부를 자주 찾아갔다. 그리고 파견 되어있는 재신들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회은군은 사은부사가 되어 심양에 가서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종친들을 돌아오게 하는 임무를 맡아 성실히 임했지만, 결국 심기원의 옥사에 얽혀 유배 갔다가 사사되고 말았던 것이다.


김자점은 권력을 잡아 인조 후궁 조씨와 협잡하여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온갖 횡포를 부렸다. 후궁 조씨의 딸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를 혼인시키기 위해 사주까지 위조하였다.

효종 때에 김자점은 북벌론을 반대하다가 효종의 미움을 받자 이형장을 청나라에 보내 북벌계획을 밀고했다. 이에 격분한 청나라는 즉시 군사를 국경선에 배치하고 조사단을 보냈다. 효종이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김자점을 유배 보냈다.

그리고 김자점의 역모가 고변되었다. 김자점의 아들 김익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후궁 조씨의 아들)을 추대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여 김자점도 거열형에 처해졌는데 심기원이 당했던 그대로 사지가 먼저 잘리고 마지막에 목이 베어졌다.


『공사견문록』에, 이형장이 청나라에 간 사이 옥사에 연루되어 돌아오면 형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맹인점사 김자명(金自鳴)이 몰래 그의 가족들에게 귀띔해주었다. 이형장의 가족은 재산을 빼돌려 김자명 집에 맡겨 두었는데, 이형장이 귀국해 사형 당하자 자식들도 모두 죽고 그 아내는 섬으로 귀양 갔다. 이후 김자명은 그 재산을 불려 큰 부자가 되었는데 그의 외아들이 기생집에서 그 많은 재산을 다 탕진했다고 한다.

(김자점의 한자가 自點 인 것을 보면 맹인 점사 김자명은 김자점의 서얼아우가 아닐까 추측된다. 그렇다고 치면, 김자명은 점복으로는 이름을 내지 못 했다고 하니 과연 김자점의 옥사를 예견하지 못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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