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적폐 능원군

by 금낭아

능원군은 1598년 선조 31년에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과 구사맹의 딸 구씨(후에 인헌왕후로 추봉)의 차남으로, 정유재란 피난 중에 태어났다. 능양군(인조)의 아우인데 11살 때, 요절한 백부 의안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능원군에 봉해졌다. 광해군의 비 유씨(유자신의 딸)의 조카인 유효립의 딸과 결혼하여 광해군 즉위 후 공신에 책록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능원군은 속공전 20결을 하사받고 소덕대부에 가자되었다.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참여했던 관료들이 처벌받았지만 능원군은 처벌받지 않았다.

인조 3년에 능원군이 정영신이라는 역관을 매질하여 죽게 하여 사헌부에서 처결을 청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능원군 이보는 의안군의 양자이고 정영신은 의안군의 종이었다. 선왕조 때 정영신이 묘를 잘 관리한 공으로 신역을 면해주었다고 하니, 이는 능원군의 종이 아닌가. 상전과 종 사이는 명분이 지극히 엄격한데 그대들은 배반한 종의 말만 듣고서 능원군에게 무거운 법을 쓰려고 하니, 진실로 그대들의 뜻을 모르겠다. 해조가 조사하면 자연히 처치할 길이 있을 것이니, 유사로 하여금 되도록 공정하게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가 다시 조사하여 아뢰니,

인조는 “대관은 임금의 이목이 되어 한 때의 공론을 주관하니 일을 논하거나 말을 함에 있어서 신중하게 해야 한다. 헌부가 배반한 종의 말만 믿고서 죄도 없는 왕손을 살인죄로 모함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만일 이러한 풍조가 점점 자라난다면 이 뒤에는 죄도 없는 사람들이 모두 애매하게 죄를 받을 것이고, 상전을 배반한 무리들이 모두 모함하는 꾀를 낼 것이다.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엄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후에 다시 조사하여 아뢰니,

“인명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종과 상전 사이라 할지라도 조금도 소홀하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능원군이 해당 관리에게 고하지 않고 함부로 태장(笞杖)을 가하여 사람의 목숨이 떨어져 죽게 하였으니 그른 일이다.” 하며 애매하게 판결 하여 재물을 바쳐 속량하는 정도의 벌을 명하였다.

이에 승지 정광성·이성구가 아뢰기를,

“대관이 일을 신중하게 논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시고, 능원군을 죄주셨습니다. 지극히 공정하십니다. 다만, 대관은 들은 것이 있으면 일에 따라 논열하는 것이 직책입니다. 능원군이 함부로 사람을 죽인 일을 듣고서 상께 말하기 어려운 처지임에도 처벌을 계청한 것은, 진실로 공론을 위함이고 국가를 위해서입니다. 어찌 그 사이에 딴 뜻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상께서 ‘왕손을 모함했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라고 하셨으니 신들이 놀라 대죄(待罪)를 청하고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시어 말씀을 거두소서.”

하니, 인조가 거절하였다.

하여 최명길·김주우·윤형언 등이 왕손을 모함했다는 죄목으로 파직을 청해야 했다.


인조 3년에는 계운궁(인헌왕후)이 위독해지자 인조는 생모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능원군에게 특별히 현록대부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 계운궁이 사망하자 예조의 건의로 인조를 대신해 능원군이 상주가 되었는데, 대신들이 이미 의안군의 양자가 된 능원군이 계운궁의 상주가 될 수 없음을 간하였으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 당시에는 상주가 되면 관직에서 물러나는 관례가 있었다. 녹을 받지 못하자 인조는 한성부 이현의 별궁을 능원군에게 집으로 내려주었다.

인조 6년에는 소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그리고 유효립의 옥사가 발생하였다. (반정 당시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류자신 아들)이 참형되고 류자신의 손자 유효립은 제천으로 유배되었었다. 유효립은 인성군이 왕이 될 상이라는 비결을 유포하여 허유·정심 등을 조력자로 삼았다. 그들의 협력으로 몰래 가마를 타고 한양에 잠입하여 인조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규합하고 궁궐의 내시와 대궐문의 수문장까지 포섭하였다. 1628년 1월 4일에 대궐문을 열고 임금의 침전에 곧장 들어가기로 모의하고, 무기를 지닌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몰래 잠입하려고 하였다. 거사 전날 허유의 숙부 허적이 고변하여 영의정 신흠이 비변사 군사를 잠복시켜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무기를 싣고 들어오던 무리들을 체포하였다)

양사가 ‘능원군의 부인 유씨가 역적 유효립의 딸이니 인조의 사친 묘의 주부로 둘 수 없다’며 능원군의 파직을 청하였지만 인조가 듣지 않았다. 또 옥당(홍문관)에서 유효립의 딸이 낳은 자손들이 사묘에 제사를 봉하게 둘 수 없다고 상차하였지만 인조가 듣지 않았다. (결국 유씨가 낳은 자식들은 요절했다고 한다) 인조가 능원군에게 유씨와 이혼하라 했지만 능원군이 거절했다. 그래서 유씨의 작호를 낮추어 첩의 신분으로 함께 살게 하였다. 후에 능원군의 서자 영풍군과 금천군이 상소하여 ‘군부인 유씨’로 복작된다.

인조 9년에 사헌부의 금리(禁吏)가 음사하는 무당을 잡아들였는데, 능원군이 종들을 시켜 금리의 처와 어미, 장모를 붙잡아다가 폭행하였다. (아마 능원권 집의 일을 봐 주는 무당 인듯 하다) 사헌부가 능원군을 파직하라 청하니 인조가 더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능원군은 화를 내며 금리의 어미와 처를 또 가두고 고문까지 하고 풀어주지 않았다. 이에 헌부에서 능원군을 파직시킬 것을 재차 청하였으나, 인조는 능원군의 종들에게만 벌을 주고 능원군의 파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의 부친 정원군이 논란 끝에 왕으로 추존되어 원종의 묘호를 받고 모친 구씨는 인헌왕후로 추존되자, 능원군도 능원대군으로 진봉되어 인조로부터 노비와 사랑채 등을 하사받았다.


인조 16년에 비국(군국기무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 비변사)에서 능원 대군을 탄일(誕日)의 상사(上使)에 충원하여 보낼 것을 청하니, 인조는 능원대군은 병이 있어 멀리 가기 어렵다며 거절하였다. (아마 청태종의 생일 축하 사절단 인듯 함)

인조 22년에 능원 대군이 집이 좁아 손님접대 할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하니 인조는 인경궁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여 옮겨다가 지어 주도록 하였다.


인조의 아우 능창군은 광해군 때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었다. 그의 천첩 딸 남편 허서는 음직으로 장악원 주부에 있었다. 능원대군과 인평대군이 허서를 지방수령으로 앉히려고 이식과 흥일에게 청탁을 하여 낙점을 받았다. 이에 조복양이 논계하니 인조는 “조복양이 자신의 당파는 비호하고 상대 당파를 치려고 대군을 침해하니, 어리석은 자의 사술이라 할 만하다.” 하며 덮었다.

인조 23년에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이 예단을 보내왔는데, 인조는 비단 20여 필과 백금 2백 냥을 능원대군에게 주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재산이라 함부로 유출 할 수 없는 것이다. 후에 현종이 청나라에서 받은 비단을 공주에게 주었다가 반발을 사 다시 반납 했다.)

인조 24에 능원대군은 영국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다.


앞서 인조 14년 때 소들에게 역병이 돌아 도축을 일절 금하여 소를 도축하는 자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한다는 명령을 내렸었다. 하여 도축자들이 궁가(왕실 종친)의 궁노로 위장하여 도축하였다. 형조·한성부·사헌부의 금리들이 체포하면 궁가에서 금리의 처자들을 구타하여서 금리들은 체포 하기를 회피했다.


인조 25년에 형조판서 민성휘가 폐단을 바로잡고자 도축자의 숫자를 한성부에 물으니 인평대군 집 소속이 42인, 능원대군 집 소속이 38인이었다. 민성휘가 두 궁의 18인씩을 뽑아서 아뢰고 한성부로 하여금 조사해서 전가사변시키도록 청하니, 인조가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인조 27년에 능원대군이 전국에서 바쳐지는 말을 중간에서 불법으로 매수하고 되파는 수법으로 높은 이득을 챙겨 물의를 빚었다. 하지만 모두 인조의 무마로 별다른 치죄 없이 지나갔다.


효종 7년 1월 1일 첫 번째 기사

‘능원대군 이보가 별세하였다. 보는 인조의 아우인데, 집에서 거처할 때의 조심스러움과 점잖기는 여러 종실들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제목을 ‘적폐의 끝판 능원군’이라 써놓았다가 ‘귀여운 적폐’로 바꾸었다. 『실록』에도 능원군이 종실 중에 최고 점잖이라 쓰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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