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 광해군 10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마저 유폐하자 불만 세력이 늘었다.
이즈음 북청에 귀양 가 있던 이항복이 꿈을 꾸었다. 꿈에 선조가 유성룡과 김명원, 이덕형(한음) 의 혼백과 논의를 하고 있었다.
“무도하고 골육을 해치고, 모후를 유폐한 광해를 폐위시킬 수밖에 없다.”
하고 선조가 말하니 한음 이덕형이 아뢰었다.
“이항복이 아니면 이 일을 결행 할 수 없으니 이항복을 명계로 불러 의논 하십시오.”
잠에서 깬 이항복은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틀 후에 사망하였다. <<연려실기술>> (반정 주모자 김류와 이귀, 최명길 등은 이항복의 제자이다)
능양군의 외삼촌인 구굉은 조카인 구인후와 함께 거사를 모의하고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구굉이 조카인 구인후를 택한 이유를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서곽잡록>>에 있다.
선조 때 삼정승을 지낸 윤승훈에게는 공부 안하기로 유명한 둘째 아들 윤숙(尹肅)이 있었다. 윤숙에게는 구인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윤숙이 좋아하는 기녀가 있어 애를 태우자 “사내가 돈 백냥 때문에 좋아하는 여인에게 못 가서야 되나?” 하며 백 냥을 내주었다. 이 모습을 본 윤승훈이 탄식하면서 “나는 정승까지 올라도 돈 백 냥 빌려 줄 친구가 없는데, 내 아들이 나보다 낫구나!” 하며 즐겁게 놀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 구인후에게 친구가 많을 터였다. 먼저 친구 이서와 신경진에게 접근하였다.
이서는 선전관 때 천안의 객사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귀매가 깃들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객방이 있어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는데, 이서는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이서는 어렸을 때부터 증조부와 조부가 꿈에 나타나 위험한 일이 있으면 피하라고 일러주어 귀신을 겁내지 않았다. 이서가 그 방에서 자고 있는데 과연 귀물이 문을 열어보더니 “부원군이 있어 못 들어가겠다.”며 문을 닫았다고 한다. <<풍암집화>>
이서는 대북파들이 폐모를 주장하며 정청(政廳)에 나갈 때 무인으로서 홀로 불참하여 눈총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거사 제의를 받자 수락했다.
“귀신들이 날더러 장차 부원군(정국공신)이 될 것이라 했으니, 거사는 성공 할 것이야.” (반정 성공 후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완풍군(完豊君)에 봉해졌다)
신경진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의 아들이었다. 전사자의 아들이라 음관으로 선전관(왕의 시위·전령·부신의 출납과 사졸의 진퇴를 명령하는 등의 일을 하는 무관승지武官承旨)에 기용되었다.
어느 날 벽란도를 건너는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소리치는데 한 맹인 점자가 “귀인이 탔으면 그 분의 덕으로 무사 할 것이오.” 하였다. 사람들이 양반인 신경진을 보고 귀인인가 물었다. 점자가 신경진의 사주를 물어 계산을 하더니 “이 분은 대제학에 부원군과 영의정에 오를 것이오. 이 분의 덕으로 배는 무사히 건너가겠소.”하니 사람들이 안심하였다.
배에서 내린 신경진이 점자에게 “무관이 어찌 대제학이 되겠는가?” 하니 점자는 “영의정이 되면 문직을 겸할 수 있으니 앞일을 장담 못 하지요.” 하였다. <<매옹한록>> (신경진 외고조손 박양한이 지음. 신경진은 인조 20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후대에 쓰여 진 것이라 점괘의 신빙성은 장담 못함)
신경진은 후에 무과시험을 보고 급제하여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으나 ,일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왜사신의 접대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이어 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신경진이었다.
거사를 위해 모였지만, 무인들만 모였으니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어 기가 막혔다.
“거사를 하려면 군사가 필요합니다.”
그러자 구굉이 병조판서 장만을 끌어들이자고 하였다.
“장만은 병이 있어 사직을 청할 정도로 허한 사람이라 불가 합니다.”
이렇게 거사 모의는 흐지부지 되고 있었다.
“문사 중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김류가 물망에 올랐다.
김류의 부친 김여물은 임진왜란의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과 함께 전사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여물은 용력이 세어 손가락으로 호두와 잣을 깨어 먹을 정도였다. 알성시에 장원하여 매일 체력을 단련하였다.
김여물이 의주목사로 나가 군사를 훈련시킬 때에 백우선 부채를 들고 신호하면 군사들이 진을 갖추어 움직였다. 명의 사신 유격이 왔을 때 배에서 환영잔치를 열었는데, 부채 하나로 군사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유격이 술잔을 떨었다고 한다. 유격이 귀국하여 나쁘게 소문을 내어 요동 관리가 문책하려 했다. 이일로 김여물은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가 백의종군을 명하여 김여물은 신립의 휘하에 들어갔다.
상주를 지키는 순변사 이일은 적이 가까이 왔다고 보고하는 척후병의 목을 베는 일이 있었다. 이 후로 척후병이 보고를 하지 않아 성 밖에 적군이 온 것도 모르고 궤멸하였다.
부원수 신립이 충주를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여물이 조령에서 막자고 제의했지만, 신립은 달천에 배수진을 쳤다. 그리고 패하여 두 장군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김류는 선조 때에 부친의 전사지인 탄금대에서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고발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광해군 때는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여 탄핵받자 사직했다. 또 정릉동 행궁에 누군가 익명으로 격문을 투서한 일이 있었는데 장유·홍서봉·김상헌·조희일 등과 함께 ‘삼청동 결의’로 지목받았지만, 허균이 꾸민 일로 밝혀져서 목숨은 건졌다.
그렇게 김류가 겨우 목숨 부지하고 있을 때에 신경진이 찾아갔다. 김류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며 <<사기>>의 은본기를 펼쳐 읽다가 신하 이윤이 왕인 태갑을 몰아내는 대목에 이르러 탄식하였다.
“신하가 어찌 왕을 추방한단 말이오?”
하니 김류가 대꾸 하였다.
“태갑이 자기 아버지 업적을 뒤집어엎으려 하니 당연한 일이지.”
하니 신경진이 지금은 어떠하냐 물으니 김류가 지금과 다르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신경진이 김류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선대 어른이 어떤 사이입니까? 함께 왜병과 싸우다 전사한 분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여 김류도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연려실기술>>
“그러면 누구를 세우는 게 좋겠소?”
그러자 김류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일찍이 선조가 손자들을 모아놓고 그림이나 글씨를 쓰게 하였다. 능양군 종(倧)은 말을 그렸는데 선조는 그림을 이항복에게 하사했다. 이항복이 북천으로 귀양 갈 때 제자 김류가 따라가 같이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다. 이항복은 그림을 김류에게 주었다. 김류는 누구의 그림인지 모르고 사랑방에 걸어두었다.
능양군이 소나기를 만나 어느 집 대문간에서 비를 피했다. 그 집의 여종이 나와서 안으로 모시려 하자 바깥주인이 없으니 안 들어가겠다고 했다. 계속 간청하기에 들어가 사랑방에 들어가니 자신의 그림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바깥주인이 들어와 인사를 나누니 김류였다. 마침 안에서 잘 차린 음식상이 나왔다. 김류는 능양군을 잘 대접하여 보내고 부인에게, 모르는 길손에게 갑자기 큰 음식상을 차렸는지 물었다.
“간밤 꾼에 어떤 사람이 어가를 타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더니, 낮에 비를 피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어서 안으로 모시고 급히 음식을 장만 한 것입니다.” <<매옹한록>>
이렇게 하여 능양군을 세우기로 결정한 이들은 이제 이귀를 끌어들이려 한다.
이귀는 생원에 합격하고 21년 후인 1603년 선조36년 47세에야 문과에 합격할 만큼 공부를 하지 않았다. 젊을 때 이덕형, 박경신, 윤섬 등과 함께 공부하다가 이인명에게 점을 본 적이 있었다.
“이귀가 가장 출세할 것이고, 이덕형(한음 이덕형이 아님)이 다음, 다른 두 분은 과거급제는 하지만 그저 그렇겠습니다.”
그 점괘를 믿어서 공부를 덜 하였던지 47세에야 과시에 합격 하였다.
이귀가 강릉참봉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덕형과 이항복 등의 주청으로 경기·황해·강원 삼도소모관에 임명된 이귀는 군사를 모집하고 세자 광해군을 도와 민심 수습에 나섰다. 이듬해에는 숙천으로 가서 선조에게 명나라 군의 주둔으로 인해 떨어진 물자 회복 대책을 진언하였다. 이런 활약을 동인의 영수 유성룡조차도 칭찬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에 오른 이귀는 정인홍의 죄악 10가지를 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광해군이 즉위한 후 대북파 정인홍의 세상이 되어 이귀는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장녀 여순(女順)이 죽은 남편의 친구와 간통한 사건으로 인하여, 딸도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616년 이귀는 해주목사 최기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아들 이시백은 시국이 불안하니 아버지에게 시골로 내려가기를 청했지만 이귀는 망설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귀의 부인이 사망하였다.
신경진이 무릎을 쳤다.
“내 북우후로 있을 때 함흥판관 이귀와 친분이 있었다. 내 문상을 가서 이귀의 의중을 떠보리라.”
이렇게 하여 이귀도 거사에 합류하였다. 이귀는 아들 이시백과 이시방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심기원, 김자점, 최명길 등과도 거사를 약속하였다.
심기원은 출사하지 않은 유생이었는데, 유배중인 김치(金緻)를 찾아갔다.
김치가 말했다.
“내 오늘 아침에 나의 운수를 점치다가 물수 변(氵)이 들어간 사람이 구제해 준다는 점괘를 얻었는데, 마침 심(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왔구나.”
하니 심기원이 능양군의 사주를 내놓았다. 김치는 사주 적은 종이를 상 위에 두고 단 아래로 내려가 절을 하였다. <<계서야담>>
그리하여 심기원도 능양군을 추천하였다.
김자점은 음관으로 벼슬을 얻어 요직에 있었고 상궁 김개시에게 뇌물을 넣고 있어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최명길은 겁이 나서 이귀의 집 책상 구석에 숨어서 잠을 잤다. 이귀가 여종을 시켜 머리를 빗겨주고 잘 달래주니 두려움이 지워졌다고 한다.
최명길은 이항복과 신흠 밑에서 수학했으며 조선 시대 유일하게 한 해(1605년)에 생원시, 진사시, 문과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후 광해군 때에 정6품 병조 좌랑을 맡고 있었다가 1614년 명나라 차관으로 인한 사건이 발생하여 파직당하고 만다. 당시 서학 유생 이홍임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중국인이 어디서 왔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포도청 군사들이 이홍임을 체포하여 무고를 해서 상을 타고자 했다. 최명길이 이 일을 조사해 이홍임의 죄가 없음을 알고 석방하였는데 대북의 실권자 이이첨이 최명길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때 부당하게 파직 당하고 부친상을 입었다. 게다가 스승 이항복이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귀양 가서 죽는 것을 보고 대성리 부근으로 내려가 10년 가까이 야인으로 지냈는데 이 때 <<주역>>을 1,00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사 날짜를 최종 낙점 한 이가 최명길이라고도 한다.
최명길과 장유와 이시백 등이 젊은 선비 때 함께 공부하면서 맹인 점사 장순명에게 점을 본 적이 있었다. 장순명이 놀라면서 말해주었다.
“어찌 한 자리에 네 명의 재상이 있을 수 있소?”
이시백은 과거급제 없이 반정공신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일곱 번 판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런 이시백이 반정 전해인 1622년 광해 14년에 억울하게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다. 분총관 안륵이 길에서 이시백을 만나자 종을 시켜 매질하게 하였다. 이에 그 아들 이각이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 일이 있고 몇 개월 후 이귀는 평산부사로 발령 난다. 이귀는 호랑이 1마리를 잡아 그 가죽을 광해군에게 진상한 뒤, 이렇게 주청한다.
“호환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나, 관할 지역을 넘어가 쫓을 수가 없으니 착호갑사에게는 경계를 두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지방의 군대가 한양으로 들어오는데 문제가 없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귀는 신경진을 중군(中軍)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것이 의심을 사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상궁 김개시에 청탁을 넣었다. 김자점의 형수 이여순은 이귀의 딸로, 남편 김자겸이 젊어서 죽자 이여순은 승려와 가까이 지내 비난을 샀다. 하지만 그 승려가 김개시와 친분이 있어 여순은 그 연으로 궁에 들어오게 되었다. 김자점은 형수 이여순을 통해 김개시에게 뇌물을 수시로 들여보냈고, 그 효험이 나타났다.
이귀에 대한 고변은 무마되었지만, 의심을 산 신경진은 평안 우후로 발령이 나지만 병을 핑계로 임지로 출발하지 않는다. 이에 영의정 박승종이 의심하여 효령별장으로 좌천 발령 내린다.
구인후 역시 의심을 받아 진도군수로 보임되었다.
마침 이서가 장단부사(長湍-경기 북부)가 되어 덕진에 산성 쌓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인연하여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켰다. 그곳에는 사촌 아우 이기축이 따라 가 있었다.
“외부군사는 마련되었지만, 안에서 호응할 군사가 필요합니다.”
“훈련대장 이흥립이 영의정 박승종의 서자 박자흥의 장인이니 반드시 포섭해야합니다”
이에 장유가 나섰다.
“내 아우 장신이 이흥립의 사위이니 아우에게 이흥립을 회유하라 부탁하겠소.”
하여 이흥립이 거사에 합류하였다.
“이제 되었소. 장단부사 이서는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부사 이중로도 부하장교들을 거느리고 달려올 것이니 천군만마의 지경이오.”
광해 14년 12월 9일 1622년에 사헌부가 평산 부사 이귀의 파직을 청하였다. 이귀가 부임하여 군사 움직이는 일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감사 이명이 평산을 순찰할 때, 이귀가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군사를 일으켜 바로잡아 구제할 뜻을 언급하였는데, 그 말을 친한 척리(戚里)에게 은밀히 발설했고, 사헌부의 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귀는 파직 되었다.
1622년 광해 14년 12월 23일 장령 이시정, 지평 한정국과 정담이 비밀리에 아뢰어 역적의 음모가 있는 이귀를 토죄하지 않고 파직만 청한 남근을 비난하였다.
광해 15년 1월 4일 이귀가 역적 음모와 무관하다는 상소를 올리고 "고변자와 대질 심문하자"고 버텼다.
대북파는 이귀의 탄핵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사했다.
여기에 얽힌 야화가 있는데, 이귀가 붙잡히자 원두표가 임게에게 달려가 방도를 물었다. 임게는 남산 아래 은 3두를 사라는 노인이 있을 테니 그 은을 사라고 일러 주었다. 원두표가 남산 아래로 달려가니 과연 은을 사라고 소리치는 노인이 있었다. 원두표가 은을 사겠다고 하니 후에 값을 받겠다며 은만 주고 사라졌다. 원두표가 이 은을 가져와 김자점이 이여순을 통해 김개시에게 보내 이귀를 빼낼 수 있었다. 반정이 성공한 후에 노인을 만나니 “나는 평양 옥에 갇힌 전 호방 서리의 증조부인데, 그 서리가 은 관리 책임을 맡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을 나누어 주었다가 사형을 받게 되었으니, 이귀를 상관으로 임명해 구제해 주십시오.” 하였다. 이귀가 관리가 되어 그 서리를 개인 포탈이 아님을 확인하고 복직시켜 은을 모두 변상하게 하였다고 한다.<<해동이적, 공사견문록>>
광해 15년 3월 12일 거사 일에 고변이 있었다.
거사일 아침에 김류는 제자 이이반이 마음에 걸렸다. 이이반 부친 이효성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다가 유배되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반정사실을 알리고 이이반을 데려오게 하였다.
하지만, 이이반은 숙부 이유성에게 고했고, 이유성은 김신국에게 말했다.
김신국이 이이반을 영의정 박승종에게 데려가 고변 하게 하였다. 그리고 박승종에게 훈련도감 이흥립을 참수하도록 권하였다. 하지만, 박승종은 사돈 이흥립을 죽이지 않았다.
박승종은 추국청을 설치하고 먼저 이후배를 궐하에 결박해놓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였다.
정작 광해군은 어수당에서 연회를 하고 있었다. (김자점이 음식을 마련하여 김개시에게 들여보냈다고 한다.) 광해군은 술에 취하여 오랜 뒤에야 고변 상소를 보았는데,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앞서 여러 건의 역모사건에 질리기도 하고 둔감해 지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포도대장과 훈련도감 대장을 부르고 도승지 이덕형(李德泂-한음 이덕형李德馨이 아님)과 병조 판서 권진에게는 밤에 입직하라는 명만 내렸다.
대신 이하 관원들이 대궐로 향했지만 대궐문이 닫혀있어 비변사에 모였다. 박승종은 훈련도감 이흥립에게 궁을 호위하게 하고, 천총 이확에게는 창의문 밖을 수색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각이라 이확은 명령을 받고도 즉시 시행하지 않았다. <<실록>>
거사자들은 이날 밤 이경(二更-밤 9~11시)에 홍제원에 모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귀·김자점·한교 등이 먼저 홍제원에 도착하니 모인 이가 겨우 수백 명이었다.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도착하지 않았단 말이오?”
“고변서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겁을 먹은 게지요.”
그러자 여러 사람이 불안해하며 동요했다.
이에 이귀가 북병사(北兵使)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이괄은 ‘義’자를 등에 붙이게 하였다.
이시백이 분대로 나누어 책임자를 정하자고 제안하여 분대장을 뽑았다.
이귀는 심기원과 원두표를 김류에게 보냈다.
그때 김류는 집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스승인 이항복이 나타났다. 크게 한숨을 쉬며 “기어이 거사 하는구나. 이번 거사는 성공하겠지만 그로 인해 장차 나라에 큰 변고가 닥치니 어이 할꼬?” 하였다. 이 꿈은 이귀도 꾸었다고 한다. 큰 변고란 바로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깨고 척화를 주장했다. <<연려실기술>>
김류가 잠에서 깨니 심기원과 원두표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대장을 맡은 공이 고변에 겁을 먹었소?”
“겁을 먹다니? 금군이 체포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들을 죽이고 가고자 하였네.”
하면서 아들에게 말안장을 얹으라 명하니 아들 김경징은 미적거렸다. 오늘 아침의 이 머뭇거림도 경징의 설레발 때문이었다.
“저런 겁쟁이가 내 아들이라니.” (후에 김경징은 강화도 검찰사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에 강화도로 왕자들과 고위 관료들이 피난해 왔지만 독단으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여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게다가 청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한다며 대비책도 없이 매일 술만 마셨다. 청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 계책을 세워보지만, 군사가 부족해 해안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동안 백성들에게 신망을 잃은 터라 백성들은 흩어졌고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나룻배로 도망쳤다. 후에 강화 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가 공신의 외아들이라고 해 특별히 용서하려 했으나 반발이 완강해 사사되었다.)
김류는 갑옷을 챙겨 입고 나섰다.
김류가 뒤늦게 도착하여 이괄을 부르자 이괄이 크게 노하였다. 이귀가 달래어 군사 있는 곳으로 가 화해시키고 김류에게 다시 대장직을 맡겼다. 이 일로 이괄의 심기가 몹시 상하여 후에 공신책록에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이날 능양군은 연서역 마을에 주둔하였다.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초조해 하며 연서역으로 마중 나갔다.
마침 이기축이 범몰이를 핑계로 장단군의 병력을 이끌고 선봉장으로 한성부 연서역에 들어왔다. 이기축은 장단부사 이서의 사촌동생이라 그동안 능양군의 별장과 장단군 사이를 오가며 거사 준비에 연락책을 맡았었다. 힘도 장사지만 우직한 성격이라 능양군이 좋아하였다. 이기축은 능양군을 보자 말에서 내려 길 왼편에 엎드려서 장단군 군사가 온다고 보고하였다.
그제야 안심이 된 능양군은 자기의 도포를 벗어서 이기축에게 입혀주었다. 반정 성공 후에 인조는 친히 그를 불러내 어포(御袍)를 벗어 입혀주었다. “내가 기축과 어울릴 때 아명을 익히 불렀으니 이제 이 녹훈에는 아명으로 기록케 하라.”하고 친히 이름을 '기축'(起築)이라고 이름을 써서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대장 김류, 부장 이귀 등은 최명길·김자점·심기원 등과 임지로 떠나지 않은 북병사(北兵使) 이괄과, 장단 방어사 이서와 김경징·신경인·신경유·이천방어사 이중로·이시백·이시방·장유·원두표·이해·장신·심기성·송영망·박유명·이항·최내길·한교·원유남·이의배·신경식·홍서봉·유백증·박정·조흡 등이 모이니, 문무 장사 2백여 명에 군사 1천여 명이었다.
이들은 밤 삼경에 창의문으로 들어갔다. 전날부터 바람이 불고 운무가 끼어 성안이 낮에도 어두웠었는데, 반정군이 문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바람이 멈추고 구름이 걷혀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이들이 창덕궁 문 밖에 도착하니 이흥립이 와서 맞이했고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를 하였다. 그리고 비변사에 모여 있던 대신 및 재신들은 군대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김류 등이 단봉문을 열고 들어갔고, 능양군이 구굉·심명세·홍진도 등과 함께 잇달아 도착하였다.
김류가 능양군을 인도하여 인정전 서쪽 뜰 호상(胡床)에 앉게 하고 여러 장사들이 줄지어 서 있으니 궁 안의 시위 장졸은 모두 흩어졌다.
입직승지 이덕형·정립·형방승지 박홍도·좌우사관과 선전관 등이 군대의 함성을 듣고 침전의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 숲에서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젊은 내시가 광해군을 업고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그리고 세자 이지는 왕을 뒤따르다 놓치고 장의동 민가에 숨었다.
처음 시작은 구굉과 구인후, 이서 등이 주도했으나, 반정에 실질적인 공을 세운 주도자는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으로 이들은 반정 성공 후 모두 반정공신(反正公臣) 목록에 올랐다.
이서는 영의정 박승종의 친척이었는데, 박승종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반정에 가담했었다. 인조가 허락하지 않자 무척 상심하였고, 김류와 이귀가 끈질기게 인조를 설득하여 일단 후일에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양보를 받아냈다. 하지만 지방으로 내려간 박승종은 장남과 같이 음독자살하였다. 이서는 인조에게 박승종의 시신을 거두게 해달라고 청했고, 인조는 의리 있는 사람이라며 허락하였다.
신경진의 누이동생은 이이첨의 아들 이대엽의 처였다. 신경진이 아우 경유, 경인 등과 모의하니 모친이 딸에게 누설하고 말았다. 누이가 남편에게 알리려 달려가는 것을 붙잡아도 소용이 없었다. 능양군이 직접 와서 왕이 되면 특명으로 구명해 주겠다 약속을 하였다고 <<매옹한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대엽의 아버지 이이첨과 동생 원엽·홍엽·익엽이 모두 죽임을 당했으나, 이대엽은 인조의 특명으로 절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에 양사(兩司)가 국왕이 사사로운 정으로 이대엽을 살려준다고 거듭 공박하자 인조는 할 수 없이 정형(正刑: 형을 바르게 집행함)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 소식을 옥중에서 들은 이대엽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대엽은 겨우 글자를 알아보는 정도여서 과거 급제도 모두 남의 손을 빌려 차술한 것이라 한다. 문과 중시에 급제한 이대엽의 답지가 이재영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인조반정 뒤에 소급해 과방(科榜: 과거 급제자를 기록한 방목)에서 이대엽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이덕형(죽천 李德泂, 한음 이덕형이 아님)은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하지 않았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수선하여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반정일에 입직을 서야 했다.
반정군이 숨어있던 광해군을 잡아오자 죽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능양군이 이를 보고 그를 충신으로 생각했다.
능양군이 김자점과 이시방을 인목대비에게 보내 반정을 알리자 대비는 믿지 않았다. 하여 이귀와 이덕형과 민성징을 보내 모셔오게 하였으나 인목대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능양군이 직접 말을 타고 광해군을 끌고 도성을 지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갔다. 서청문 밖에서 절하고 통곡을 하니 인목대비가 안심을 하였다.
인목대비가 이처럼 행동한 이유가 있었다. 거사 3개월 전인 1622년 12월에 이이첨의 심복 이위경과 백대형이 인목대비를 시해하려고 밤에 나례희(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잡귀를 쫓는 궁중 행사)를 가장하여 요란하게 징과 북을 울리며 경운궁으로 진입했다. 이때 인목대비의 꿈에 선조가 나타나 피하라고 하여 궁녀와 옷을 바꿔 입고 후원으로 피신하여 궁녀가 대신 죽었다. 영의정 박승종이 급히 하인들을 이끌고 와서 인목대비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속잡록>>
드디어 왕대비의 지위를 되찾은 인목대비는 능양군에게 어보를 바치라고 명하였다.
하여 능양군이 어보를 대비에게 바쳤다.
이귀가 대비에게 정전에 납시어 대신들 앞에서 어보를 전하라 청하였지만 대비는 아무 하명이 없었다.
능양군이 엎드려 있다가 집에 돌아가 대죄하겠다고 하니 군신들이 말렸다.
대비가 능양군을 불러들여 능양군의 공을 치하하였다.
군신들이 속히 어보 전할 것을 청했지만 대비는 능양군에게 먼저 선조에게 배사(拜謝)하라 일렀다.
이에 민성징과 군신들이 어보를 전하여 즉위 한 후에 응당 종묘에 고할 것이라며 재촉했다.
하지만 대비는 “어보를 전하는 것은 큰일이니 초라하게 예를 행할 수 없다. 내일 서청에서 예를 갖추어 행할 것이다.” 하고 버텼다.
이에 도승지 이덕형이 청대하여 아뢰었다.
“국가가 위태하여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사군(嗣君-선왕의 대를 이어 받은 임금)께서 종묘사직의 대계를 위해 몸소 갑주를 입고 이 대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이 이미 귀부하고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보를 전하는 일을 밤이 깊도록 결단하지 않는 것은 왜입니까? 만약 속히 국보를 전하여 위호를 바루지 않는다면 어떻게 난국을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빨리 국보를 전하여 신민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니 그제서야 어보를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