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광해 12년, 구인후가 숙부 구굉에게 아들의 혼처를 의논했다.
“우리가 이 나이에 이리 변방에서 맴돌아서 되겠습니까? 좋은 혼처라도 구해서 자식 대에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숙질 간 이지만 숙부 구굉 과는 한 살 차이였다. 쉰이 되어 가는 구굉은 황해도 장연현감에 머물러 있다.
“무신이 조정에 발을 들이기가 쉽더냐? 아버님 또한 끈 떨어진 종실과 사돈을 맺었을 뿐, 뾰족한 수가 없구나.”
구굉의 누이는 선조의 5남 정원군에게 시집갔다. 누이의 둘째 아들 능창군은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고 말았다. (광해군 시절 신경희는 그 아버지 신잡이 광해군을 옹립하는데 세웠던 공을 내세우며 대신들을 헐뜯어 대신들이 탄핵했지만, 광해군은 신경희에게 관대하였다. 그러던 중에 소명국이 신경희를 역모죄로 무고하였고, 신경희는 국문을 받다가 옥사하였다.)
누이의 첫째 아들 능양군(인조)은 아우를 살리기 위해 유희분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하늘’과 사돈을 맺어야 합니다. 5대조 선조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은 화려했던 5대조 구수영을 회상해 본다.
구수영은 세조시절 영의정 구치관의 조카였다. 12세에 영응대군(세종의 여덟 째 아들)의 사위가 되어 세조로부터 선략장군부호군을 제수 받았다. 예종 때에 절충장군에 오르고, 성종 때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곧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어 군대 통솔의 책임을 맡았고, 이어 상의원제조를 지냈다. 연산군 때는 넷째 아들 구문경을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와 혼인 시키고 지돈녕부사에 올랐다. 대간들이 부적당하다고 탄핵했으나 오히려 판돈녕부사로 승진되고, 이듬해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장악원제조가 되어 연산군의 유흥을 도왔으며, 그 공로로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렇게 ‘하늘’과 사돈을 맺어 승승장구 잘 나가던 구수영이었다. 그런데 딸 사돈은 끝이 좋지 않았다.
첫째 딸은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에게 출가시켰는데, 임희재가 연산군을 비판하는 글을 써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었다.
둘째 딸은 안양군에게 출가시켰는데, 후에 연산군이 성종 후궁인 정씨와 엄씨가 자신의 생모를 참소하여 죽게 했다며 그 아들 봉안군과 안양군에게 생모 정씨를 때리게 하였다. 연산군은 다음날 생모를 때린 상으로 안양군에게 말 한 필을 내리고 며칠 뒤 제천으로 유배 보냈다. 이듬해인 1505년 안양군은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그 처첩은 다른 종친에게 노비로 들어갔다.
구수영이 경기순무사로 나가 있는 동안 박원종 등이 반정을 논의 하고 있었다. 구수영의 서자 구현휘가 기루에서 자고 있다가 반정논의를 몰래 듣게 되었다. 제거 명단에 구수영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말이 들리자 끼어들었다.
“제 아버지 구수영은 왕에게 사위 둘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임시직으로 외방에 쫓겨나 있으니 그 반감이 적지 않습니다. 하여 저를 미리 보내어 동참을 허락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수영은 자기도 모르는 새 반정군 명단에 들었다. 반정이 있던 날 밤에 구수영의 종들은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반정군에게 제공하였다. 구수영은 가만히 앉아서 정국공신 2등에 책록 되고 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하지만, 연산군이 폐위 되자 구수영의 넷째 아들은 능양위의 작위를 잃었다.
구수영은 ‘하늘’과 ‘구름’과 사돈을 맺어 떵떵거리고 살았지만, 반정이라는 ‘바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운 좋게 반정공신에 이름을 올려 다시 일어섰지만, ‘바람’도 어쩌지 못하는 ‘돌미륵’이 있었다.
그 돌미륵이 바로 ‘조광조의 신흥 사대부’ 무리였다. 그들은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해 105명의 공신 중 부당한 녹훈자와 2등 공신 이하 76명의 훈작을 삭제하였다. 그리고 연산군의 충복이었던 구수영을 탄핵하였다.
하지만, ‘바람도 넘어뜨리지 못한 돌미륵’인 조광조 일파를 쓰러뜨린 세력이 또 있었다. 훈구파 홍경주·남곤·심정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하여 조광조를 의심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조광조와 신진사류의 과격한 도학정치에 질려있던 중종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였다. 결국 조광조의 신진 사대부는 투옥되었다. ‘돌미륵’을 쓰러뜨린 것은 협잡의 힘이었다.
회상에서 돌아온 구굉과 구인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구수영의 아들 구희경은 신수근의 조카사위였다. 중종의 원비가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내쫓겼을 정도이니 구희경은 조정에 발도 디밀지 못하였다. 그런 구희경의 후손인 구인후는 숙부 구굉의 손을 당겨 잡았다.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면 결국은 훈구 세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바람’이 되고 ‘들쥐’가 되어 ‘돌미륵’을 쓰러뜨리고 ‘하늘’을 가리는 ‘구름’이 되는 겁니다. 우리와 뜻을 함께 할 이들이 있습니다. 신경진(신립 아들)은 사촌 신경희의 억울한 죽음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서(李曙)는 대북파에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무인 중에 이서 홀로 정청에 불참하여 눈총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모의 아들 능양군을 왕으로 세우자 이겁니다.”
하여 구인후는 1620년, 이서·신경진·구굉 등과 함께 정변을 모의하였다. 후에 김류·이귀·최명길·장유·심기원·김자점 등이 모의에 참여하여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에 구인후는 진도군수가 되어 1623년의 반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계획을 세운 공로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 되고 능천군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순오지』야서혼(野鼠婚) 설화,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