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후궁 인빈 김씨는 1555년 명종 10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4남5녀를 두고 손자가 인조이다. 인조부터 순종까지의 왕들이 모두 그녀의 후손이다.
외조부 이효성
인빈 김씨를 있게 해 준 첫 번째 남자는 외조부 이효성이다. 이효성은 효령대군의 셋째 아들 보성군 이합의 의 증손자이다. 그러니까 인빈 김씨는 태종의 후손인 것이다. 고조부 이합은 남이와의 친분으로 역모죄에 얽혀 아들 춘양군과 함께 군호를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후에 풀려났다.
부친 김한우는 무관으로 이효성의 딸과 혼인하였다.
남편 선조
외사촌 언니인 명종의 후궁 경빈 이씨를 통해 궁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경빈 이씨가 궁에 들어오는 이야기가 <<연려실기술>>에 있다.
문정대비는 아들 명종에게 아들이 없어 근심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알 수 없는 이가 나타나 “상주의 이 아무개에게 딸이 있는데 궁중에 들여오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잠에서 깬 문정왕후는 사람을 보내 이씨의 딸을 찾아오게 했다.
어느 승려가 이씨 있는 곳을 가르쳐주어 데려온 사람이 이첨정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 명종의 꿈에 화재가 나서 성 안을 다 태우고 있는데, 한 여자가 남쪽에서 와서 물을 뿌려 불을 끄고는 상주 이모의 딸이라고 했다. 하여 수소문 하니 한 승려가 이첨정의 딸이라고 알려주어 궁녀로 들였다고 한다.
이첨정의 딸은 명종의 후궁 숙의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후궁 자리가 불안해 지니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래서 외사촌아우를 데려다 키우며 인순왕후의 눈에 띄게 하였다. 하여 인순왕후가 귀여워하며 심부름을 시켰다.
<<금계필담>>에 김씨가 선조와 만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명종 사후 경빈 이씨가 선조를 초대하여 차를 대접하였다. 그 옆방에 어린 김씨를 앉혀놓고 문틈으로 치마폭이 보이게 하였다. 선조가 궁금하여 물으니 “고모의 딸이 한양에 놀러왔다기에 궁으로 부른 것입니다. 시골 아이라 볼 것이 못 됩니다.”
하니 선조가 안달이 나서 졸라 댔고 이씨는 외사촌아우 김씨를 선조에게 인사 시켰다.
선조는 김씨 얼굴에 복기가 가득 찬 것을 보고 후궁으로 들였다고 한다.
사실 선조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은 공빈 김씨였는데, 인빈 김씨는 공빈의 허물을 자주 들춰내곤 했다.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1577년 사망하던 해에 인빈 김씨는 첫 아들 의안군을 낳고, 이듬해 신성군을 낳아 선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피난가면서 의인왕후가 아닌 인빈 김씨를 데리고 갔다. 피난 중에도 임신을 하여 황해도 행궁에서 정휘옹주를 낳을 정도로 총애하였다.
오라비 김공량
1591년 선조 24년에 이른바 세자 건저 사건이 터진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렇다.
서인이었던 정철이 동인의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등과 상의하여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세자 책봉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기로 한다. 그런데 기축옥사로 정철에게 원한이 있었던 이산해는 마음을 바꿔 김씨의 오빠 김공량과 결탁한다. 이들은 인빈 김씨에게 “정철이 신성군 모자를 죽이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려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선조에게 전해졌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정철이 선조 앞에서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를 꺼냈다가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로 인해 선조는 광해군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게 되었고, 인빈 김씨 쪽과 광해군 쪽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광해군이 세자가 되고, 신성군은 1592년 피난 중에 요절한다.
김공량은 1592년(선조 25) 내수사의 정5품 별좌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백성들이 김공량의 실정을 고발하였다.
“오늘날의 사태는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으로 일을 꾸며서 인민이 원한을 품게 되어 외적의 침입을 초래한 것이온데,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숙원 김씨에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삼사(홍문관, 사간원, 사헌부)가 합계하여 김공량의 효시를 청하니, 선조가 김공량을 감싸기 바빴다. 김공량은 끝까지 처벌을 받지 않았고, 인빈 김씨 덕택에 천수를 누렸다.
나중에 인조 대에 김상헌이 윤근수의 행장에 ‘김공량은 당시 영상 이산해가 세력에 빌붙고자 밤에 그의 집에 찾아 갔고...... 궁금(宮禁-궁궐)과 내통하여 안팎으로 권력을 농락한 자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에 인조가 노여워하면서 “김상헌은 인정도 모르는 사람” 이라며 행장을 고치게 하였다.
사돈 구사맹
인빈 김씨 또한 피난 때 구설에 올랐다. 《후광세첩》에 따르면, 인빈 김씨가 피난 중에 모친 제사상을 차리게 하였다. 이에 윤두수는 “종묘에 올리는 제사도 오랫동안 폐하였는데, 인빈은 자신의 어머니 제사를 올린단 말입니까?” 라고 쓴 소리를 하였다.
의주 행궁에 있을 때는 인빈 김씨(이때는 숙의였다)가 남긴 퇴선 음식을 신하들에게 주게 하였다. 정철이 화가 나서 구사맹에게나 갖다 주라고 하였다. 구사맹은 김씨의 아들 정원군의 장인이다. 후에 그 아들 구굉과 손자 구인후가 바로 김씨의 손자 능안군을 왕(인조)으로 옹립한다.
사돈 신립
아들 신성군이 신립의 딸과 혼인하였다. 사돈 신립은 이탕개의 난이라 불리는 여진의 침입을 막아낸 장수로 선조의 왕권을 지지해 주는 버팀목이었다. 신립의 아들 신경진은 후에 인조반정의 주모자가 된다.
둘째 아들 신성군은 임해군이나 광해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력한 세자감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사망하여 인빈 김씨에게 최고의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인빈 김씨의 처세는 남달랐다.
선조의 어린 새 왕비 인목왕후가 들어오는 날에 다른 후궁들은 낯빛을 흐렸지만 인빈 김씨는 인목왕후를 반겼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인목왕후의 아들로 대접하고, 자신에게 어머니라 부르지 못 하게 했다.
전쟁 중에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광해군의 자리가 확고해 지자 김씨는 노선을 변경하여 광해군의 후견인이 된다. 영창대군파 유영경이 광해군파 정인홍을 공격할 때, 선조는 광해군을 미워했는데 김씨가 변명을 해주어 노여움을 풀게 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모친 공빈을 핍박했던 김씨지만 서모의 예로 대접하였다. 그래서 광해군 즉위 후에도 신성군의 동생 정원군이 무사했던 것이다.
인빈 김씨에게는 또 쟁쟁한 사위들이 있다.
첫째 딸 정신옹주의 남편 서경주는 선조의 장인 김제남과 사돈이 된다. 서경주의 딸 서미성이 김제남의 차남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다.
김제남은 인목대비의 부친으로 영창대군의 후광을 입고 부와 명예를 누리다가 광해군에게 사사되고 다시 부관참시 되기까지 했다. 이때 서경주가 시신을 수습해 준 의리의 남자였다.
인조반정 후, 폐서인 되었던 인목대비가 복원되자 제주에 위리안치 되어있던 김제남의 부부인 노씨를 모시러 가는 배편에 까치 한마리가 날아와 돛대에 앉더니, 제주에 도착하자 노씨 부인에게 날아가 배소의 나무 위에서 울었다고 한다. (제주에는 까치가 없다고 한다. 1989년 일간스포츠신문사가 창간 20주년을 맞아 아시아나항공의 도움으로 까치를 제주도에 풀었는데, 까치가 감귤농사를 망치는 주범이 되었다고 한다)
그 손자 서문중이 외조모 인빈 김씨가 후궁으로서의 겸양이 있었다고 자주 예찬하였다고 한다.
정혜옹주의 남편 윤신지는 글을 잘 짓고 서화에 능하여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게다가 두 아들까지 총명하여 한때는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두 아들이 자신보다 일찍 죽는 바람에 약 20여년을 은거하며 지내다가 죽었다.
정숙옹주의 남편 신익성은 신흠의 아들이다. 1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 중 5남 4녀만이 성장하였다. 신익성은 김육의 아들 김좌명을 사위로 맞았다. 김좌명의 아들이 숙종 때 허적을 제거한 김석주이다.
광해군 5년에 신흠이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자, 정숙옹주는 시어머니 옆에서 거적을 깔고 단식하기도 하였다. 이후 신흠이 유배형에 처해져 가계가 곤궁해지자 정숙옹주는 정성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봉양하고, 남편 신익성의 누나가 신흠의 유배지에 문안을 가던 도중 병에 걸려 죽자,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었으며, 신익성의 여동생 또한 돈독하게 보살펴 주었다. 근검하고, 자녀교육에 엄했으며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궁중에 발길을 끊었다.
<<동패낙송>>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신익성이 어느 여관에 들었는데, 그 집 말이 새끼를 낳았다. 그 주인 얘기로 암말이 강가에서 풀을 뜯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더니 강에서 용이 나와 말과 교합하여 수태한 것이란다.
신익성이 말의 사주를 보고 명마의 사주라 30냥을 주고 좀 더 자라면 데려가겠다고 하였다. 얼마 후 망아지가 날뛰며 사람을 해치다가 고삐를 끊고 도망갔다가, 신익성이 여관에 오자 달려와 반겼다. 신익성이 천리마라 이름 지었다.
신익성이 폐모 사건 때 제주로 귀양 간 사이 광해군이 빼앗아 타는데, 천리마가 날뛰어 떨어뜨리고 도망쳤다. 말이 바다를 건너 제주로 왔단다. 신익성이 숨겨두었는데 인조반정 날 큰소리로 울었다.
정안옹주의 남편 금양위 박미의 부친 박동량은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의 사촌이다.
<<매옹한록>>에도 말 이야기가 나온다.
박미가 가마를 타고 가다가 어영청에서 인분을 나르는 일을 하는 말을 보고 말 두 마리와 바꾸었다. 어영청의 관리인이 금양위 임을 알고 말 값이 후하다며 말 한 마리를 끌고 왔지만 그냥 돌려보냈다. 잘 먹여 좋은 말이 되자 말을 빌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등뼈가 조금 솟고 흉하게 생겨 안장을 얹으면 비스듬히 돌아가서 곡배마라 불렸다.
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부친 박동량이 김제남과 가까운 사이라 하여 아산에 유배되었다.
광해군이 곡배마를 빼앗아 타니 말이 날뛰어 광해군을 떨구고 도망갔다. 유배지에 찾아오자 박미가 숨겨 놓았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큰 소리로 울어 산악이 진동하였다.
후에 조정에서 청에 사신을 보내고 나서 문서를 수정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새 문서를 작성하여 전달하는 일에 곡배마를 추천하였다. “의주에 닿거든 하루 동안 곡배마에게 물과 먹이를 주지 말고 안정을 취하게 한 다음 주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기수가 압록강을 건너려는 사신단을 만나 문서를 전한 다음 기절하고 말았다. 깨어보니 역졸들이 곡배마에게 먹이를 주어 죽어있었다.
정휘옹주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에 황해도 해주의 행궁에서 태어났다. 인빈 김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정휘옹주는 유영경의 손자 유정량과 혼인하였다.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던 일로 광해군과 대북파의 탄핵을 받고 광해군 즉위 해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으며 4년 후인 1612년 광해군 4년에 그 일가가 몰살되다시피 하였다. 이때 유정량도 유배를 갔다가 인조반정 때 풀려났다.
인빈 김씨는 증손자(후에 소현세자)의 탄생까지 지켜보고 1613녀 광해군 5년에 사망하였다.
광해군은 조회를 3일간 중지하라고 명을 내려 애도하려 했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무산 되었다.
신주는 저경궁에 봉안되었다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매년 10월 넷째 월요일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제사를 받고 있다.